(38)울산왜성(蔚山倭城) 제3편 왜성보다 전장(戰場)

▲ 반구동에서 본 울산왜성과 학성산.

‘침략자의 유산’ 관리 소홀
임진왜란·정유재란때 만든 왜성
30곳 달하지만 대부분 훼손·방치

울산왜성서 동북아 3국 치열한 전투
성내에서 격렬히 저항하는 왜군과
왜성 에워싼 조명연합군의 대치
日‘조선군진도병풍’에 생생히 묘사

울산왜성 보존 필요성
침략자·방어자 모두 뼈아픈 상처
주변 전적지에 3국 문화 펼치는 등
문화콘텐츠 개발도 검토해볼만

한반도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울산왜성에서부터 서쪽의 순천왜성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만들어졌던 왜성은 30곳 가까이에 이른다. 그런데 2017년 현재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해안 숲속에서 무너진 채 내버려져 있거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더라도 다른 지정문화재에 비해 관리가 소홀한 편이다. 이렇게 왜성이 홀대받는 것에는 침략자의 유산이라는 이유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의 물음 속에서 한반도에 남겨진 왜성은 전쟁을 기억하여 교훈으로 삼아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 대표적으로 울산왜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졌던 동북아 3국의 치열한 국제전투가 있다.

정유재란기인 1597년 11월 초순 여러 왜장들에 의해 동해안의 최전선 기지로 축성이 시작되었던 울산왜성은 12월 말경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러 성의 수비를 담당할 가토 기요마사에게 인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왜군은 조명연합군의 기습을 받게 되었고 13일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울산왜성전투가 시작되었다. 울산왜성전투는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의 동아시아 3국이 참여한 국제전쟁의 양상을 띠었던 만큼 이에 관한 기록은 어느 역사적 사건보다 풍부한 편이다. 우리나라의 문헌으로는 <선조실록>을 비롯하여 신흠의 <상촌집(象村集)>,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등이 있으며, 일본측 자료로는 <가등청정전(加藤淸正傳)>, <조선물어(朝鮮物語)>, <천야행장고려진잡사각서(淺野幸長高麗陣雜事覺書)> 등의 문헌이 있다.

▲ 울산왜성전투도.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투의 상황을 생생하고 직접적으로 보는 주는 것으로는 <울산성전투도>가 있다. 이 전투도는 울산왜성에 갇힌 왜군을 구원하기 위해 김해에 위치한 죽도왜성에서 달려 온 사가현(佐賀縣) 번주(藩主)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제작한 그림이다. 정식 이름은 <조선군진도병풍(朝鮮軍陣圖屛風)>로 모두 3폭의 그림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그림에는 울산왜성을 포위한 조명연합군과 성에 갇혀 농성을 지속하는 비참한 왜군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두 번째 그림에는 부산·기장·김해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의 지원(구원)군이 태화강의 남쪽에 도착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조명연합군과 대치하는 모습을 담았다. 세 번째 그림에는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대의 야간 기습을 받아 퇴로가 막혀버린 조명연합군이 서둘러 경주방면으로 퇴각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 병풍도의 원본은 나베시마가 휘하의 화공에게 시켜 그린 것이지만 1874년 ‘사가의 난’ 때 소실되었으며, 현존하는 그림은 1669년에서 1698년 사이, 인근 시마바라번(島原藩)의 마츠다이라(松平) 가문이 작성해 가지고 있던 사본(寫本)을 바탕으로 1886년에 오쿠보 세츠도(大久保雪堂)가 다시 제작한 작품이다. 이 3폭의 그림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첫 번째 그림으로 울산왜성을 가운데에 두고 3국이 전쟁을 벌이는 장면이 생생히 담겨 있다.

1597년 12월23일 이른 새벽, 조명연합군은 울산왜성 주변에 주둔한 왜군의 보루와 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가 주둔한 울산왜성을 불시에 습격하였다. 조명연합군은 3군데(3협)로 나누어 울산왜성을 향해 진격하였는데, 좌협은 반구정(伴鷗亭, 현재의 반구동 내황일원)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포위하고, 중협은 병영의 길을 통해 곧장 울산왜성으로 진격하였으며, 우협은 태화강의 적 보루(현재의 태화루 일원)를 포위하였다. 이 때 총 지휘관은 명나라의 경리(經理) 양호(楊鎬)로 그는 병영성 일원에서 직접 전투를 독려하였으며, 제독(提督) 마귀(麻貴)는 최전선에서 총병관으로서 전투를 지휘하였는데, 신두산(神頭山, 현재 충의사가 위치한 학성산)이 그곳이다. 울산왜성의 급보를 듣게 된 서생포왜성의 기요마사는 부산의 본영(本營)에 구원군을 요청한 뒤 측근 20여명과 함께 중형급의 배인 ‘세키부네(關船)’ 1척에 승선하여 어둠을 틈타 밤 8시경 울산왜성에 들어왔다.

전쟁은 다음날 오전 6시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조명연합군들은 북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분발해 공격하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화전(火箭) 수백 발이 이에 상응하여 동시에 날아갔는데, 세찬 바람에 불길이 타오르면서 적진을 마구 불태워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승승장구하여 반구정과 태화강 두 곳의 적진을 소탕하자 남은 왜군들이 도망쳐 왜성으로 들어가기 바빴는데, 이 때 왜성의 입구가 좁아 왜군들이 서로 넘어지고 밟아 압사자가 발생하는 등 처참한 광경이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로써 울산왜성을 중심으로 한 전투는 왜성을 에워 싼 조명연합군과 왜성에서 격렬히 저항하는 왜군의 대치형국으로 변했다. 울산왜성은 성벽이 견고하고 지형이 급경사로 험준하여 먼저 진격한 조명군사는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밖에 있는 군사 역시 성을 쉽게 허물지를 못했다. 특히, 왜성의 성벽 위에 축조한 야구라(櫓)는 성 밖으로 돌출되어, 올려다보며 공격하는 조명연합군을 향해 비가 뿌리듯 조총을 퍼부어 조명 지휘관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조명연합군은 전법을 바꾸어 성을 에워싸서 물과 식량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기로 했다.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비가 간간이 내리기는 했지만, 왜군의 갈증과 배고픔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어서 흙을 파먹고, 말(馬)의 피를 받아 마시는 등 고통이 극에 달했으며, 혹독한 겨울 추위에 조명연합군의 상처 또한 매섭게 얼어붙었다.

이처럼 전쟁은 그 결말에 이를수록 침략자나 방어자 모두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울산왜성은 3국이 치열하게 싸운 전쟁의 교훈과 그 전장(戰場)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며, 그 때문에 더욱더 울산왜성을 잘 남겨두어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이러한 기억을 보다 명확히 되새기기 위해 그들이 치열하게 딛고 다녔던 길(路)에 3국의 문화를 펼치고(3국 거리), 신두산(神頭山, 현재 학성산)과 울산왜성(島山)에 각각 진을 치고 대치했던 핵심적인 두 산(山)의 관계를 부각하는 등 울산왜성 주변에 전적지로서의 3국(조선, 명, 일본) 문화콘텐츠 개발도 검토해 볼만하다. 이러한 문화콘텐츠의 개발은 특별한 기억을 일상(日常)으로 바꾸어 영원히 잊지 않게 한다. 그래서 울산왜성은 왜성보다 전장(戰場)의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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