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익 감독의 열두 번째 작품인 영화 ‘박열’이 28일 개봉과 동시에 예매율 1위로 흥행 포문을 연 가운데 실제 독립운동가 박열의 삶 역시 재주목 받고 있다. 박열 캡처.

이준익 감독의 열두 번째 작품인 영화 ‘박열’이 28일 개봉과 동시에 예매율 1위로 흥행 포문을 열었다. 같은 날 개봉하는 한국 영화 ‘리얼’을 뛰어넘었다.

오후 들어 ‘박열’을 관람한 관람객들의 호평 역시 쏟아지고 있어 예매율은 더욱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독립운동가 박열의 삶을 그린 영화 ‘박열’이 개봉하자 실제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박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독립운동가 박열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으로 1921년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및 사회주의자와 함께 동경 흑도회를 창립했다.

이후 1922년 반전활동가였던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와 만난다.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함께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결성해 조선의 독립 운동을 후원하고, 일본 천황제 타도를 지향했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해 10만여 명이 사망하고 수십만 동의 건물이 무너지는 대 참사를 맞이한 일본은 대지진의 공포를 조선인과 사회주의자에게 돌리려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탄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다.

그리고는 “불령선인들을 수색하고 선량한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한인들을 검속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불령사의 회원들은 이 때 일제히 체포됐다. 이후 박열은 일경의 신문 과정에서 일왕에 대한 폭탄 암살 계획을 밝히고 재판에 서게 됐다.

박열은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자신을 죄인취급하지 말 것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을 것, 조선어 사용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박열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일본사법부가 그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였고 이후 박열은 조선 전통관복을 입고 일본 법정에 출두해 반말로 답변하는, 초유의 법정투쟁을 벌였다.

결국 재판에 과정에서 두 사람은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선고 직후 열흘 후인 4월 5일, 대역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무기로 감형됐다.

무기징역으로 복역중이던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옥중에서 교살된 채 발견됐다. 당시 타살 의혹이 강하게 일었으나 형무소 측은 가네코 후미코의 시신 인도 요구를 모두 거절하고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박열은 22년 2개월 복역 끝에 출소해 1946년 2월 백범 김구의 부탁을 아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봉환 추진위원장을 맡아 활동 했다.

후에 박열은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당시 서울에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으며 1974년 1월 북한 당국은 박열의 사망 소식을 전해왔다. 디지털뉴스부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