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2)이상숙 시비

▲ 석재장에 일 년이 넘도록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서전 시비. 당초 이 비석은 2016년 세워질 예정이었지만 일부 문인들의 반대로 아직 언제 세워질지 모를 운명에 있다.

울산문협 초대 부지부장 서전
지역 문화공간 확보 차원 명다방 건립
70년대말 울산문인 사랑방 역할 톡톡
생활고에 찌든 문인들의 시름 달래줘

울산 있는 동안 사회활동 펼쳐
화조회 결성, 형편 어려운 학생 지원
제1회 장학금 수혜자는 정갑윤 의원
서울갈때도 명다방은 그대로 두고가

서전 문학비 건립 지지부진
시비 제작완료…작년말까지 세우기로
일부 문인의 반대·행정 문제로 ‘제동’
추진위원 싫다는 이유로 반대해서야

서전(瑞田) 이상숙은 울산 문화의 텃밭을 가꾸었던 인물이다. 해방 후 울산에는 일제강점기 문화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연극과 음악 등 문화운동을 펼쳤다. 이 때 문화운동을 격려하기 위해 이영도, 안수길, 모윤숙, 김동리, 오영수, 유치환씨가 울산을 찾았다.

그때만 해도 울산에는 조직적인 문화 단체가 없었고 문인들 대부분이 너나없이 가난해 이들을 대접하지 못했다. 울산문인협회 초대 부지부장이었던 서전은 그나마 문화계 인사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이들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당시 울산은 문화공간도 부족했다. 문화인들이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해보아야 북정동 3·1회관뿐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규모가 작고 시설 또한 노후해 문화행사를 모두 수용할 처지가 아니었다.

문화공간이 부족하다보니 시화전과 음악회 등 문화행사가 주로 다방에서 열렸지만 다방 역시 3~4곳 밖에 되지 않아 문화행사를 모두 수용할 형편이 못되었다.

서전이 문화 활동을 열심히 한 것은 그가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경남고를 거쳐 서울농대를 중퇴했던 서전은 해방 후 대현중학교, 울산제일중학교, 울산중학교 국어교사로 일했다. 지금도 울산에는 당시 그로부터 배운 제자들이 많다. 1957년에는 <백양지> 동인이 되었다.

서전이 돈 벌이가 잘되었던 해동 여관을 허물고 이곳에 명 다방을 건립한 것은 순전히 모자라는 문화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명 다방은 그가 서울로 가는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울산문화 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서전은 명 다방을 찾는 문화계 인사들에게도 야박하지 않았다. 점심때면 호주머니를 털어 식사를 대접했고 저녁이면 한 잔 술을 마시면서 생활고에 찌든 문화인들의 시름을 달래 주었다.

정은영씨는 최근 발간한 <다방열전>에서 명 다방을 이렇게 표현해 놓고 있다.

“명 다방은 울산예술인들이 자주 찾았던 다방으로 유명하다. 울산예총 초대 회장을 지냈던 최종두 선생은 ‘70년대까지만 해도 울산의 예술인들은 주로 명 다방을 중심으로 문화행사를 가졌다’면서 ‘당시는 아무 때나 명 다방에 가면 예술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명 다방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울산문협 태동의 산실이었다. 이상숙씨가 서울로 간 후에도 여전히 울산지역 예술인들에게는 좋은 쉼터가 되었다.”

서전은 서울로 갈 때도 울산의 문화공간 역할을 충실히 했던 명 다방은 팔지 않고 갔다. 서울에서도 그는 박상지, 박종우 등 울산출신 문인들을 자주 만났고 가끔 서울로 오는 울산 문인들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울산에 있는 동안 사회 활동도 열심히 펼쳤다. 당시만 해도 울산에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서전이 참여한 ‘화조회’는 이런 학생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지만 당시 이 모임에 참여했던 인물로는 이종수 치과원장, 박동훈 울산문화방송 국장, 김규형 동아약국장, 화가 최희가 있다. 이들은 제1회 장학금을 당시 제일중학교를 다녔던 정갑윤에게 주었다.

정씨는 이후 경남고와 울산대를 거쳐 국가 서열 7위인 국회부의장까지 되는데, 이 때 이 장학금이 없었다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알 수 없다.

서전은 서울로 간 뒤에도 <下午의 噓>, <목각의 새>, <나는 위험한 존재> 등 시집을 여러 권 발간하면서 문학 활동을 열심히 펼쳤다. 그의 시집에는 ‘태화강’, ‘함월산’, ‘옥교동 애상곡’ 등 옛 울산을 그리워하는 시들이 많다.

이런 그가 울산 사람들 앞에 알려진 것은 4~5년 전이다. 당시 서전은 이미 제일생명을 떠나 서울의 변두리인 남양시에 살면서 자연을 벗 삼아 별들을 노래하고 있었다. 울산 인물사를 연재하고 있던 나는 가끔 서전에게 전화를 걸어 해방 후 울산 인물들에 대해 묻곤 했다.

그리고 ‘이상숙과 명 다방(89회)’ 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삶을 알렸다. 그가 작고한 일주 일 뒤인 2015년 6월에는 다시 ‘이상숙과 울산 문협(156회)’이라는 제목으로 서전의 문학 활동을 정리해 보도했다.

이후 서울 가족들이 서전의 문학비를 울산에 건립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이 때 비석 문제에 관한 한 해방 후 서전과 문학 활동을 함께 했던 울산문단의 중진 최종두 시인과 협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최 시인을 가족들에게 소개했다.

이후 최 시인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비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런데 가끔 비 건립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때는 이미 가족들이 많은 돈을 들여 비석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비석이 있다는 언양의 석재장에 가보았다. 거대한 비석이 마당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었다. 비석은 2단으로 상석과 받침석으로 되어 있었다. 상석은 오석으로 서전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고 ‘태화강’ 시도 새겨져 있었다. 옆면에는 울산 문인들을 주축으로 한 추진위원들의 이름도 볼 수 있었다.

주인 김종완씨는 “이 비를 지난해 연말까지 세우기로 하고 만들었는데 일 년이 지났지만 아직 비가 세워지지 않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비가 건립되지 않은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일부 문인들의 반대와 행정상에 문제가 있었다. 추진위원들에 따르면 비가 세워진다는 소문이 나자 일부 문인들이 관청을 찾아가 “서전이 울산문단의 발전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이냐”면서 항의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서전에 있지 않고 추진위원들을 좋아하지 않는 일부 문인들이 비 건립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추진위원 중 한명은 “비 건립을 반대할 이유가 없으니 어떤 문인들은 이 사업을 맡고 있는 최 시인이 돌아간 후 후배들이 자신의 비를 세워주기를 바래 이 사업을 하고 있다”면서 “억지를 쓰는 바람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 형국이다. 그동안 가슴앓이를 많이 했던 서전의 딸 국희씨는 “아버지는 시가 보여주듯 평생 남과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사셨는데 이렇게 자신의 시비 때문에 울산 문인들 사이에 알력이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당장 이 일을 그만 두라고 하실 것”이라면서 “지금이라도 비 건립 문제를 없는 것으로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비오는 날이면/강 저편에서 누가 부른다/눈보라 내리는 밤이면/강 저편에서 누가 부른다//삼산들 유채화인가/고사리 배꽃인가/모래톱에 묻어둔/어린 시절 꿈이던가/간절한 소망 속에/나는 누구를 찾아/水煙을 튀겨/배회하는 도요새가 되려나/나와 같이 고독하고/나와 같이 슬프고/그래도 나와 같이 살아/요동하고 있는 태화강

한 세대도 아니고/두 세대 전 태화강을/머리 속에 건져 낸다/마음 고조 그리고 환호/비단 구름 잡고 누워/강은 유유히 흘러간다//누구는 단정하기를 /서라벌 여인 남빛 스란치마/ 널리 퍼진 형국이라고/누구는 또 말하기를/언양자수정 쪼아 풀어 논/강이라 단연코 내세운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우정동 찬호도 그렇고/반구동 홍제 그리고 다들/강심에 탯줄 묻고는/보습 날 세워 밭 갈고/팔뚝 힘줘 강물 껴안았다/ 주황 노을에 재첩 캐어/돌아오는 황포돛배/삼산노루목에 이르자/이 닻줄 쥔 채 조으는 사공/갈밭 게개비 가동대는 소리에/게슴츠레한 눈 비비며 일어난다/썩어가는 몸뚱이가 애닯아/애달파 물을 퉁겨봐도/현란한 아침에 보이지 않고/휘영청 명월도 보이지 않는/축 처진 죽어가는 강으로/마음 아프게 누워 있구나’

앞의 시는 서전이 1979년 쓴 <下午의 噓)와 1999년 <나는 위험한 존재>의 시집에 실린 ‘태화강’이다.

그는 이처럼 시를 쓸 때 마다 울산을 생각하고 울산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그런데도 일부 문인들의 반대로 그의 시비가 일 년 넘어 석재장에 방치되어 있다는 것은 울산 문학의 역사를 흐리게 하는 행위다. 너무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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