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울산왜성(蔚山倭城) 제4편 학성공원 일원만 울산왜성이었을까?

▲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울산왜성 방어체계(1967년 항공사진에 표기, 이철영 작성).

필자·울산과학대 연구자
‘울산왜성 평면도’ 제작

왜성, 학성공원뿐만 아니라
중구 중심부에 넓게 걸쳐있어
태화강·동천을 끼고 열려있는
곳곳의 골짜기·길 따라
조명연합군 공격 가능성 때문

전쟁과 충의의 역사 문화콘텐츠가
울산 중구 곳곳에 스며있어

울산왜성의 전체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평면도를 보는 것이 효과적인데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4∼5개 정도이다. 가장 이른 것은 일제강점기의 1911년부터 1924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산림과가 ‘국유림(國有林)구분조사’를 실시하면서 1913년에 작성한 <학성산 국유림경계도>이다. 하지만 도면의 작성 목적이 국유림 가운데 국유지로 보존할 곳을 분류하는데 있었던 만큼 성곽은 아주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 울산왜성의 공간층위 개념.

한편 1915년 7월에는 울산공립보통학교(현재 울산초등학교)의 교장이었던 고미야 겐조(小宮謙藏)가 일본과 우리나라의 여러 문헌자료를 모아 울산왜성에 관한 글을 썼으며, 이것을 1930년 ‘울산성지보존회(蔚山城址保存會)’가 <울산성지고(蔚山城址考)>라는 이름으로 정식 간행하였다. 이 책의 맨 뒤에 <울산성지(울산왜성지) 실측도>가 수록되어 있는데, 도면 명칭에 비록 실측도라는 말을 붙이기는 했으나 이 역시 비전문가가 그린 것이어서 성곽은 개략적인 형태만 파악할 수 있는 정도다.

 

이에 비해 일본 육군 축성부 진해 지부장이었던 하라다 지로(原田二郞)가 제작한 ‘울산성 평면도(蔚山城繩張圖)’는 전문가답게 앞의 두 도면에 비해 매우 자세하다. 이 도면에는 ‘울산성의 방어’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만큼 왜란 당시 공격과 방어 형국까지 표기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현재 사이타마(埼玉) 현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도면에는 울산왜성의 본성뿐만 아니라 반구동성터(東部洞城)와 서부동성(西部洞城), 선착장, 학성산 등 주변부에 이르기까지 당시 유적의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도면의 내용은 학성공원 내에 현존하는 성벽 유구와 비교해 볼 때 거의 일치하며, 울산왜성의 보존상태가 지금보다 훨씬 좋았던 일제강점기에 조사·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소실되고 없는 부분까지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 새로 작성한 울산왜성 전체 평면도.

이를 보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그들 선조들의 유적인 울산왜성을 선양하기 위해 매우 집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일본으로부터 부산에 도착하여 서울로 향하던 일본 관광단이 굳이 울산에 들러 울산왜성을 반드시 답사하고 간 것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이처럼 당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강제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울산왜성을 조사하고 보존에 힘썼다면, 현재의 우리는 임진왜란의 참상(특히 울산왜성 전투)과 일제강점의 치욕을 잊지 않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대상이었던 울산왜성을 조사하고 보존, 정비하는데 힘을 써야 한다.

하지만 광복 후 우리의 손에 의해 작성된 도면으로는 1984년 실시된 ‘남외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 중 도로에 편입된 울산왜성 동측 구간을 1985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후 작성한 ‘울산왜성 측량도’가 유일하다. 그러나 이마저도 발굴조사 구간과 비교적 성벽이 잘 남아있었던 본환(本丸) 부분과 그 동쪽 토성만을 중점적으로 측량하여 작성하였기 때문에 성곽 전체의 형태나 구조를 이해하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

이에 필자를 포함한 울산과학대학교 연구자들은 울산왜성의 전체 윤곽을 파악하기 위해 2012년부터 현재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남아있는 유구에 대한 GPS측량과 현장조사를 실시하였고 1960년대 항공사진, 일제강점기 지도와 지적도, 각종 고문헌 등을 분석·종합하여 ‘울산왜성 평면도’를 작성하였다.

이를 토대로 울산왜성의 전체구조를 살펴보면, 우리가 울산왜성이라고 부르는 현재의 학성공원뿐만 아니라 정유재란 당시에는 그 바깥쪽으로 더욱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다 개념적으로 정리해 보면, 울산왜성은 수장(우두머리 장수)이 머문 본성(本城)과 부장(부하 장수)이 바깥쪽에 전진 배치하여 머문 출성(出城)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본성은 여러 겹의 소곽(小郭, 즉 1~3지환, 대곡륜 등)이 단을 이루며 돌(石)로 쌓은 주곽부(현재의 학성공원)와 토성(土城)으로 쌓은 외곽부로 구성되었다. 주곽부는 해발 50m인 산꼭대기에 본환(本丸, 일지환)을 두고, 본환 북쪽 아래 해발35m 지점에 이지환(二之丸)을, 그 아래 서북쪽 해발 25m 지점에 삼지환(三之丸)을 두었다. 주곽부 남쪽의 태화강에 맞닿은 부분에는 군수물자 및 병력 수송을 위해 항시 배를 댈 수 있는 ‘凹자’ 모양의 선착장도 만들었다.

또한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주곽부 밖으로는 태화강에 면한 남쪽을 제외한 동·북·서쪽 3면에 2.7km의 토성(土城 = 土壘(토루))와 해자(垓字)를 두르고 목책(木柵)을 세워 외곽부를 구축하였다. 이 외곽부 토루 중 동쪽으로 뻗었던 것(학성공원에서부터 중앙여고까지 뻗어 있었음)을 울산 사람들은 그 모습이 긴 나팔처럼 생겼다고 해서 ‘나팔등’ 또는 ‘나발등’이라고 불렀다.

한편 외곽부의 바깥 3군데에는 전진 배치한 출성(出城)을 두었는데, 동쪽 출성(반구정보루)은 동천(東川)과 약사천(藥泗川)이 만나는 해발 20m의 작은 언덕 위(현재의 반구동 한라그랜드아파트), 북쪽 출성(성황당 보루)은 학성산(현재의 충의사가 위치한 산), 서쪽 출성(태화강 보루)은 태화루 옛터(현재의 태화루)가 바로 그곳이다. 이들 출성은 본성과는 다르게 돌(石)로 쌓지 않고 나무(木)를 둘러 세워 땅에 꽂아 만든 목책(木柵)으로 구성한 간략한 형식을 취하였다.

이를 보면, 울산왜성은 현재의 학성공원이 있는 곳뿐만 아니라 태화루에서부터 동천에 이르는 중구의 중심부, 즉 원도심 전역에 걸쳐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울산왜성이 넓은 구역에 걸쳐 있었던 이유는 태화강과 동천을 끼고 곳곳에 열려있는 골짜기와 길(路)을 따라 조명연합군이 언제든 공격해 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울산왜성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넓게 구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학성동과 반구동 일원으로 좁혀보는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 전적지는 보다 넓게 볼 필요가 있다. 이를 현재의 측면에서 돌아보면 울산 원도심 중구는 이와 관련하여 골목, 골짜기, 하천 곳곳에 전쟁과 충의의 역사문화콘텐츠가 스며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