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그림 이상열

 

여옥은 하령을 그녀에 곁에 잡아두고 싶었지만 그를 잡는 것은 바람을 붙잡아 새장 속에 가두어두는 것보다 힘들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의지가지없는 여옥의 마음과 발걸음은 늘 가야산 자락 고향 뒷동산의 아기무덤에 가 있었다.

그녀는 무덤 앞에 엎드려 잡초를 쥐어뜯으며 혼잣말을 하곤 했다.

‘바람에 소리 없이 떨어진 가여운 꽃잎아,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너는 어둠 속으로 내려갔구나. 서러워라, 너에 대한 그리움으로 목이 길어진 나리꽃만 네 무덤을 지키고 있구나. 나리꽃아, 너를 생각해도 마음이 괴롭구나. 꽃 하나 풀잎 하나를 생각하는데도 이렇게 괴로운데 하물며 우리 아가 너이겠는가. 괴롭고 외롭구나.’

그녀는 몇 개월 동안 미친 듯이 아기무덤만 다니다 문득 가야산을 쳐다보았다.

“정견모주님.”

여옥은 가야산을 보며 정견모주가 나타난 생시 같은 꿈을 떠올리며 말했다.

“모주님, 대왕이 하지 않는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모주님도 당신의 후손이 창대하길 원하시지 뇌질왕가의 대가 끊어지기를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제가 지극정성을 다 하겠습니다. 부디 아이 잃은 가여운 이 어미를 굽어 살피시옵소서.”

여옥은 허물어진 가야산 정견모주 사당을 복원하고 백 번의 제사를 올렸다. 하령왕은 그런 여옥을 보면서 ‘쓸데없는 짓’이라고 끌탕을 치면서도 막지는 않았다.

▲ 그림 이상열

여옥이 가야산신 정견모주를 잘 모신 덕분인지 백 번의 제를 치르기도 전에 둘째아이를 회임하고 대가야는 승승장구했다. 하령은 철기군을 바탕으로 14가야의 맹주가 되고, 금관가야에 있는 왜의 임나일본부를 임나왜소로 격하시켰다. 대방과 낙랑이 함락된 이후 침체되었던 철교역도 살아났고, 가야는 건국 이래 최대의 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백제, 신라, 가야 삼한이 동맹하여 아리수에서 고구려와 건곤일척의 대전을 벌이다 고구려에 대패해 하령은 참수당하고 삼족이 멸하는 참변을 당했다.

여옥의 친정인 갈성씨는 다라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이자 적화에 큰 저택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전란에 갈성씨도 멸문지화를 당하고 집은 불타 없어졌다. 잡초가 웃자란 마당에 깨진 기왓장과 타다 만 서까래가 뒹굴고 있었다.

여옥은 헛간으로 쓰던 어두운 움집으로 들어갔다. 고상지와 병사들도 홰를 켜고 따라 들어왔다.

고상지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비밀통로가 있는지 샅샅이 살펴라!”

어두운 움막 안에는 삼신에게 바치는 정화수 한 그릇과 짚과 천으로 만든 보금자리가 있었다.

우리말 어원연구    바람. 【S】va(바), 【E】wind(바람), air(공기). 동국정운에는 ‘바흐람’, 순경음 ‘ ’으로 음가가 ‘v’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바람이란 어원으로 보면 ‘바 + 흐름’으로 ‘공기가 흘러간다’, 혹은 ‘공기와 물을 함유한 것’이란 뜻이다.

다라국은 합천으로 비정되고 적화는 현재 합천군 야로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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