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3)낙화암과 장인수

▲ 어릴 때부터 미포만에 살면서 낙화암을 사랑했던 장인수씨가 1966년 그린 낙화암을 배경으로 한 관광도시 입면도.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이 입면도를 청와대에 보내 한때는 청와대 국토개발 연구실에서 근무했다.

동구로 돌아온 낙화암
70년대초 현대重 건설하며 폭파
옛모습은 사라지고 일부만 남아
올해초 울기등대 입구로 옮겨와

낙화암 미스터리 많아
새겨진 시, 기녀의 슬픈전설 담아
망국의 한 안은 백제의 궁녀설도
끝자락 ‘원유영’ 이름도 의견분분

고향 미포만 사랑했던 장인수씨
개발계획도·사진 청와대에 보내
국토개발 연구실에 3개월간 근무
건강 나빠져 고향 내려왔다 정착

낙화암이 동구주민들에게 돌아왔다. 낙화암은 동구 일산동 미포만 백사장에 있었다. 미포만은 현대중공업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동해의 푸른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바위가 있어 절경이었다. 경치가 아름답다 보니 시인 묵객들이 많이 다녀갔다. 이들은 미포만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들을 낙화암에 남겼다.

미포만의 아름다움과 기녀의 슬픈 전설을 안고 있는 이 시는 오래전부터 동구 주민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동구의 향토사학자 장세동이 지은 <울산동구지명과 문화이야기>에는 낙화암에 새겨진 두 수의 시가 있다.

化落昔何年 東風吹叉發 岩春不見人 空佇滄冥月

그 옛날 어느 해 꽃이 떨어졌던고/봄바람 언 듯 부니 꽃은 다시 피었건만/낙화암에 봄이 와도 그 사람 보이지 않고/달빛만 하염없이 푸른 바다 서성이네

曉來雲氣重 紅月忽岩前 照向人間去 春晴萬里天

새벽에 구름과 안개가 끼었더니/저녁엔 붉은 달이 바위 앞에 나타났네/지난달 비추었던 옛 사람은 가고 없건만/끝없이 봄 하늘만 활짝 개었네

낙화암에는 옛날 울산의 부사가 기생들을 데리고 미포만에 와 놀다가 기생이 바위 위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기생이 입었던 붉은 치마가 파도에 밀려 미포 앞바다 섬에 걸렸다고 한다. 따라서 이 섬을 홍상도(紅裳島)라 불렀고 또 녹색저고리가 파도에 밀려 나온 곳을 녹수금의(錄袖錦衣)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이처럼 애달픈 전설을 간직했던 홍상도와 낙화암은 70년대 초 미포만에 현대중공업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홍상도는 돌섬이었는데 지금은 방파제가 되었고 낙화암은 파괴되어 바다에 묻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낙화암의 일부를 당시 한국프렌지 김영주 회장이 남목 집에 보관했다. 그리고 김 회장이 타계한 후 이 바위가 올해 초부터 울기등대 입구 주차장으로 옮겨져 지금은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다.

50여년 만에 옛 모습을 완전히 잃고 전혀 낯선 곳으로 온 것이다. 옛 낙화암은 거대한 바위로 여러 편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아쉽게도 낙화암 시가 새겨졌던 바위는 폭파되어 사라졌고 현재 울기등대에 서 있는 바위는 그 일부다.

낙화암 바위에는 미스터리가 많다. 이 바위의 시가 언제 새겨졌는지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다. 전설의 여인 기녀도 실제로 기녀인지 궁녀인지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일부 동구 주민들은 낙화암에 나오는 전설의 기녀가 단순한 기녀가 아닌 망국의 한을 안고 떨어진 궁녀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라가 망했을 때 경주 궁궐에 살았던 한 궁녀가 백제 멸망을 생각하면서 낙화암 바위에서 망국을 탓하면서 바다에 떨어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한다.

시 끝자락에 남아 있는 ‘元有永’도 의문이다.

원유영은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울산에 왔던 목관이다. 그런데 시 아래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그가 이 시를 지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시를 지은 사람이 다른 사람인지 명확하지 않다. ‘元有永’의 이름은 동축사 뒤 관일대에도 있다. 그는 관일대에 ‘부상효채(扶桑曉彩)’라는 명 필적을 남겼다.

바위에 새겨진 글자 중에는 마모가 심해 판별이 어려운 글도 있다.

낙화암이 파괴될 당시만 해도 개발 붐으로 이처럼 귀중한 바위가 파괴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평생을 미포만에 살면서 그때부터 이미 낙화암의 귀중함을 알았던 사람이 있다.

장인수씨의 낙화암 사랑은 유별나다. 그는 낙화암 때문에 크게 출세할 기회도 가졌다. 장씨가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향 미포만으로 돌아올 무렵 미포만에 조선소가 생겨 개발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장씨는 조선소가 세워져도 아름다운 낙화암이 파괴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낙화암을 배경으로 미포만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 울산의 유명 관광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눈만 뜨면 낙화암 일대를 지켜보면서 관광지로 개발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했다.

그리고 낙화암과 미포만을 배경으로 한 마을의 도시계획도를 자주 그렸다. 이 무렵 부산의 이종 사촌형 김인준씨가 카메라를 갖고 미포만을 방문했다. 이때 김씨에게 부탁해 낙화암의 아름다운 절경을 모두 찍었다. 그리고는 미포만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자신이 그린 미포만 관광지 개발계획도와 사진을 함께 넣어 청와대에 보내었다.

“그 때만 해도 제가 설계도는 잘 그렸지만 편지는 잘 못써 청와대에 보내는 편지는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물론 그 때만 해도 제가 보낸 설계도 때문에 제가 청와대로 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설계도를 부치고 얼마 되지 않아 놀랍게도 청와대 비서가 지프를 타고 직접 장씨를 찾아 미포만으로 왔다. 비서는 청와대에서 장씨의 설계도를 검토해 본 결과 관계자들의 호응이 좋았다면서 서울로 함께 가자고 했다. 그는 서울로 가기 전 울산시장을 만나야 한다면서 다음날 시장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다음날 장씨가 옥교동 시장실로 가니 비서가 최병환 시장과 마주 하고 있었다. 그날 최 시장은 그와 비서를 당시로는 울산 최고급 요정이었던 상록관에 데리고 가 점심 대접을 했다. 서울로 간 장씨는 청와대 인근 여관에서 잔 후 비서의 알선으로 바로 건설부 차관을 만났다. 그리고 그 앞에서 동구 개발 브리핑을 했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다 보니 그날 제가 브리핑을 제대로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브리핑이 끝나자 차관이 저에게 국토개발도시계획 연구실에서 근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장씨에 따르면 당시 국토개발연구실에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모여 있었지만 실무에서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자신의 학력이 낮아 그 문제를 연구실 실장과 협의했더니 실장이 연구실에서 일을 하면서 야간대학을 다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국토개발과 관련된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 3개월 동안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일하다보니 건강이 나빠져 고향에서 쉬다가 다시 올라갈 생각으로 미포만으로 다시 왔다.

이후 연구실에서 여러 번 편지가 왔지만 그는 끝내 서울로 가지 않았다. 대신 동구를 돌면서 지역개발로 사라진 옛 마을의 모습을 찾는데 전력했다. 특히 그는 미포와 전하, 녹수 마을의 옛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힘썼다.

“개발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마을은 천년의 풍상을 이겨낸 문화유산들인데 공장이 들어선다고 해 하루아침에 마을이 사라진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그동안 장씨는 울산의 옛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전국을 돌면서 고문서 자료실을 뒤지고 수원에 있는 국립지리원도 여러번 방문했다. 그는 울산의 옛 지도를 많이 갖고 있다. 이 지도에는 울산 해안이 살아 있고 삼산도 아직 평야다. 50만 인구를 목표로 설계된 울산 도시개발계획 지도도 갖고 있다.

그가 가진 설계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이 1966년에 만든 낙화암 일대 개발설계도다. 달력 뒷면에 그린 이 조감도에는 낙화암 앞에 서양식 최신 건물이 몇 동 보인다. 장씨는 칠순을 훨씬 넘겼지만 지금도 옛 미포만 자리에 살면서 공장지대가 되어버린 미포만을 보면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낙화암이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이 바위가 겪은 풍상과 역사가 스토리텔링으로 담겨야 한다. 안내문 하나 없이 외롭게 서 있는 낙화암에게 장씨가 갖고 있는 각종 자료가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는 스토리텔링의 주제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에는 동구문화원이 동구에 흩어져 있는 옛 낙화암 사진을 모아 낙화암 사진전을 열 것이라고 한다. 이 사진전 역시 낙화암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행사가 되었으면 한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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