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력원자력이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공사의 약 3개월간 잠정 중단을 기습적으로 결정했다. 13일 노조와 지역주민들의 회의장 출입봉쇄로 무산됐던 이사회는 14일 오전 9시께 경주 보문단지 내 한 호텔에서 비밀리에 재개됐다. 13명의 이사들이 전원 참석했고 12명이 찬성했다. 정해진 수순에 의한 형식적 절차를 거친 셈이다.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우려하는 지역사회와의 ‘사회적 합의’도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말한 사회적 합의의 대상에 지방자치단체나 지역주민들은 없었던 모양이다.

기습의결의 후폭풍은 예상대로 만만찮다. 탈원전을 반대하는 노조와 지역주민, 원자력학계, 정치권 등은 연대 투쟁을 예고했다. 김기현 울산시장도 “졸속결정이다. 지방정부 의견을 전혀 듣지 않고 결정한 소통의 부재다.”라고 비판했다. 노조는 이날 이사회를 ‘도둑 이사회’로 규정하고 의결무효 또는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사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강구하고 있다.

사실상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지역문제가 돼야 할 이유는 없다. 탈원전은 곧 국가의 에너지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다.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전문가에 의해 충분히 검토한 다음 국민적 공감대 속에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도록 탈원전과 친원전측이 제각각 논거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이 국가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의 첫단추가 돼 버렸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두고 탈원전과 친원전으로 양분돼 제각각 일도양단의 결론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국민적 갈등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때까지 오랜 시간 성실하게 공을 들이는 당연한 절차로 나아갈 기회가 원천차단된 것만 같아 여간 아쉽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소통과 지방분권을 약속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잠정중단을 결정하기 전에 지방정부와 협의를 거치지도 않았고, 지역주민들에겐 납득할만한 보상을 약속하고 이해를 구하는 절차조차 없었다. 잠정중단 결정이 난 다음 한수원이 시공사·협력업체의 인건비 등을 보전해주고 지역경제에 피해가 없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이 전부다. 공론화를 결정한 국무회의나 잠정공사중단을 결정한 한수원 이사회 모두 속전속결하는 바람에 절차적 신뢰에 대한 논란도 적지 않다. 이같은 상황에서는 3개월 뒤 공론화위원회­배심원단이 내린 결정이 수용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문대통령이 말한 ‘사회적 합의’의 진정성을 되짚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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