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그림 이상열

 

고상지는 바닥에 흥건한 피와 탯줄, 태반을 확인보고서야 여옥에게 말했다.

“이제 아이를 건네주시죠. 폐하의 명을 집행하겠습니다.”

여옥은 수경의 아이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이 놈들아, 이 아이를 절대 내줄 수 없다.”

그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고상지는 여옥의 품에서 아이를 매정하게 빼앗아 당석에 목을 잘랐다. 울던 아이의 울음이 그치고 아이의 피가 짚더미에 흘러들어갔다.

아, 차라리 저 칼에 수경의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가 죽었더라면.

‘수경아, 수경아.’

여옥은 수경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여옥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고향 적화의 봄 동산에서 수경이와 함께 뛰놀고 있었다. 웅크린 겨울 끝에 고향의 나무들도 봄의 기지개를 펴고 있었고 개여울에는 잔 햇살이 반짝반짝 했다.

둘은 봄 동산에 나란히 앉아 서로 다정하게 손을 잡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 그림 이상열

“수경아, 우린 커서도 만날 수 있을까?”

“같이 사는 마을에서도 만나기 힘든데 어른이 되면 더 힘들겠지.”

“왜 우리는 만나면 안 되는 걸까?”

“집안이 달라서 그래. 여옥이 너는 높은 집안, 나는 낮은 집안.”

“그래도 너네 집은 우리보다 돈도 많고 너는 나보다 아는 것도 많잖아.”

“그렇다고 내가 너보다 높지는 않아.”

“내가 볼 땐 네가 나보다 훨씬 높은 것 같애.”

여옥은 다라국의 명문 호족 갈성씨 집안이지만 대가야의 금림왕과 맞서다가 몰락했다. 수경은 골편수인 아버지를 따라 신라 달천 쇠부리 마을에서 가야 다라국 적화로 옮겨온 객가로 평민이었다.

가야사회는 엄격한 네 계급의 신분제도가 있어 왕족 호족 평민 노예가 서로 어울리지 못했다. 여옥과 수경이 만날 수 있는 건 열흘에 한 번 쟁을 배울 때 뿐이었다. 쟁을 배우고 난 뒤 둘은 뒷동산에 올라 적화마을을 보면서 얘기를 나눴다.

여옥은 수경이 골편수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세상 구경을 많이 하고 들은 것도 많아 이야기 듣는 것이 즐거웠다. 수경은 좁은 적화에 갇혀 사는 소녀에게 크넓은 세상의 꿈을 꾸게 했다.

새들은 깃을 털고 눈부신 날개 짓을 하고 있었고 마을에는 구수한 밥 냄새와 된장국 냄새가 흘러넘쳤다. 인동초가 올라간 돌담 골목길에는 주막강아지 골목강아지들이 즐겁게 어울려 뛰어놀고 있건만. 신분이 다른 여옥과 수경은 잡았던 손을 놓고 헤어졌다.

혼절했던 여옥의 정신이 간신히 돌아왔다.

‘아, 수경아. 너는 지금도 왕비인 나보다 훨씬 높구나.’

우리말 어원연구 다라국은 지금의 합천 지역이다. 다라는 고대어로 산, 들, 벌을 뜻한다. 다람쥐는 산쥐이다. 북한에서는 박달, 배달, 아사달의 어원을 밝다라, 배다라, 아사다로 보고 단군이 밝음을 뜻하는 부루(불, 박, 발, 밝)를 종족명으로 삼아 아사달인 평양에 고조선을 도읍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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