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춘봉 사회부 차장

지난 14일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은 기습적으로 이사회를 열고 신고리 5·6호기 건설 일시중단 안건을 통과시켰다. 전날 이관섭 한수원 사장은 이사회 개최가 예정된 한 시간 전 경주 본사 별관에서 이상대 범군민대책협의회장과 김병기 한수원 노조위원장 등과 비공개 면담을 가졌다.

면담을 마친 이상대 회장은 밝아 보였다. 면담 내용에 대해 발언은 삼갔지만 상당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면담 직후 한 상임이사는 이 회장과 함께 주민들의 집회현장을 찾았다. 그는 “한수원은 주민과 함께 한다. 한수원을 믿어 달라”는 발언을 하고 39.7℃의 폭염 속에서 집회 중인 주민들을 위해 천막을 설치해 주기까지 했다.

주민들과 함께 하겠다는 한수원의 상생 의지는 여기까지였을까. 불과 16시간 뒤 한수원은 보문단지내 한 호텔 지하 2층에서 비밀리에 이사회를 열고 안건을 의결했다. 앞뒤 출입문은 모두 잠갔고, 출입문에 달린 작은 유리창은 안에서 막아 내부를 전혀 볼 수 없게 했다. 뒤늦게 사실을 파악한 주민들과 노조는 이사진이 약속을 어겼다고 반발했다. 노조는 현장을 방문했지만 간발의 차로 의결을 막지 못했다.

그렇다면 전날 비공개 면담에서는 어떤 말들이 오갔을까? 대책위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이 사장은 주민들과 노조의 반발이 심할 경우 무리하게 이사회를 강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또 다음 이사회 일정이 잡히면 주민들과 노조에 통보하기로 했다.

기습 이사회 나흘 뒤 열린 주민 간담회에서도 한수원은 주민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한수원은 지역 주민과 함께 한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면서 몇 가지 약속을 했다. 상임이사 전체가 원전이 안전하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낼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 사장은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또 공사가 일시 중단되더라도 이주와 관련된 협의는 계속 진행해 공론화가 마무리되면 즉시 집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지켜진 약속은 아직 하나도 없다. 한수원이 주민과의 상생에 대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앞서 지난 3일 열린 서생 주민과의 간담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 사장은 일시 중단이 법적인 근거가 있냐는 주민들의 지적에 법적 근거를 검토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후 공개된 이사회 회의록 내용을 확인한 주민들은 다시 한번 분노했다.

한 이사는 두 차례나 “이사회 의결에 의해서 배임이라던가 민·형사상 책임에 대해서는 회사가 책임을 지는 것으로 명시를 합시다”라고 주장했고, 또 다른 이사는 “배임이나 손해배상같이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이사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죠”라고 재확인했다.

19페이지에 달하는 회의록에서 주민들에 대한 걱정이나 상생에 대한 고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은 자문을 통해 건설중단 의결이 법적인 근거가 있냐, 없냐를 확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근거를 찾았던 것이다. 되풀이되는 한수원의 약속 불이행으로 주민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법에도 없는 공사중단을 의결해 놓고 법적으로 명시된 지원금은 못준다는 게 어느 나라 법이냐”는 한 주민의 말이 떠오른다. 한수원은 더 늦기 전에 포괄적이고 세부적인 대책을 만들어 상생에 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상생의 조건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약속 이행이다. 추락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쉽진 않겠지만 “주민과 함께 한다”는 초심을 생각한다면 의외로 해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춘봉 사회부 차장 bong@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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