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그림 이상열

 

제 살을 깎은 반달이 동산에 떠올랐다. 아픈 달빛이 주산 능선의 왕족 고분군들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후누 장군은 죽은 하령왕의 철갑옷과 철투구, 환두보검을 방 한 칸에 걸어두었다. 후누는 울적한 기분에 밤늦게 혼자 고령주를 마시며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며 아내 수경이 들어왔다.

“또 잠을 자지 않고 이 귀신같은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군요.”

“요즘은 술을 한 잔 하지 않으면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겠소.”

“장군이 되어 술에 젖어 있으면 어떻게 군을 통솔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모두 고상지 도독 하에 고구려 군대가 되어 있는데 무슨 낙이 있겠소.”

후누는 달빛에 반짝이는 갑옷 미늘과 장식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 그림 이상열

“난 이 갑옷을 입은 선왕과 함께 철기군을 이끌고 고구려와 싸워 이긴 그 때가 그립소.”

“당신은 늘 술에 취해 과거에 살고 있어요. 대가야가 망해 고구려의 속국이 된 현실을 인정하세요.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가야왕비를 첩으로 거느리면서 천하를 호령하고 있는데다가 우리 대가야가 망한 틈을 타 금관가야가 다시 열두 가야의 맹주가 되었어요.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요.”

아내 수경이 쉬지 않고 잔소리를 했다.

“당신이 가야의 산천을 다시 푸르게 회복시킬 수 있어요? 그건 거짓 희망이에요. 힘을 가진 고상지 도독과 박지 집사에게도 맞서선 안돼요. 지금 집집마다 골목마다 고구려와 금관가야의 세작들이 들끓고 있는 것 뻔히 알잖아요. 이러다간 당신 자리마저도 제대로 보전하지 못한다구요.”

후누 장군은 아내의 잔소리에 이골이 났다. 차라리 장군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시골에 들어가 밭이나 갈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는 주군이 없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라고 절망했다. 하령왕을 이을 꺽감이 그에게 마지막 남은 위안이자 희망이었다. 반드시 꺽감 왕자를 훌륭히 성장시켜 대가야로 모셔와 이 황금갑옷을 입히고 권토중래를 하리라는 속다짐을 했다.

“여보, 우리가 시련을 겪는 이 시련의 시기는 지난 사백 년 가야 종통과 앞으로 있을 장구한 미래에 비하면 탄지 같은 짧은 시간이오. 이것도 곧 지나갈 것이오.”

탄지는 손가락을 튕기는, 아주 짧은 시간을 말한다.

“종주국 고구려가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어느 천 년에 꺽감을 데려와 왕위에 앉히고 다시 나라를 회복한단 말이에요. 당장 거덜 난 살림에 숨통을 돌리는 게 우선이에요. 지금 우린, 아이를 비명에 잃은 뒤 아이도 생기지 않잖아요. 도대체 이렇게 술만 마시고 어쩌자는 거예요?”

화가 난 수경은 자신도 고배에 술을 따라 들이켜 버렸다.

“우리 아이는 조금만 기다려봅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씨앗을 보거나 양자를 들이면 아이가 생긴다고 하는데, 씨앗은 죽어도 싫고 당신이 오매불망하는 꺽감을 데려오면 어떨까요?”

“그건 위험하오.”

우리말 어원연구 잇다. 닛다(용비어천가). 【S】iyuda(이유다), niyuda(니유다), tie up w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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