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5)‘100세 시대’ 울산

▲ ‘울산 100세 시대’를 예고하듯 40여년 넘게 천전리 각석의 지킴이 역할을 해온 올해 100세의 박장국씨가 양산 요양원에서 맑은 정신으로 천전리 각석의 보전 방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손후익의 딸 응교씨
독립운동가 심산의 둘째 며느리로
불구의 심산 수족 노릇하며 일생 보내
작년말 타계…남편과 대전현충원 합장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창 일송 김병희
국가 산업·공업화에 자문맡아 큰 공헌
글쓰며 100세까지 살다 올해 운명

천전리각석 40년 지킴이 박장국씨
작년까지 입구에서 방문객 맞았으나
100세 된 지금은 양산서 요양원 생활

100세 시대’가 열린다는 얘기가 우리주위에서도 심심찮게 들린다.

이를 반영하듯 울산사람들 중 손응교와 김병희씨 등 100세까지 살다가 타계한 사람이 있나 하면 천전리 각석의 지킴이 박장국씨는 100세의 연령에도 아직 정정하다.

1918년 울주군 범서읍 입암에서 태어났던 손씨는 독립운동가 손후익의 딸이다. 손후익은 일제강점기 영남의 이름난 한학자로 입암에 서당을 열어놓고 후학을 양성했다. 문체가 좋았던 그는 당시 울산 재실의 상량문도 많이 썼는데 현재 입암 선바위에 있는 용암정 상량문도 그의 글이다.

1905년 영남유림의 을사조약 페기 운동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던 손씨가 군자금 모금에 뛰어든 것은 심산 김창숙을 만나면서다. 심산이 군자금 모금을 위해 만주에서 국내로 잠입했을 때 그를 도와 영남지역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던 인물이 손씨였다.

그리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손씨의 딸 응교는 심산의 아들 찬기에게 시집을 가 심산의 둘째 며느리가 되었다. 응교가 시집을 갈 때 심산의 장남 환기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왜경의 고문 끝에 이미 별세했고 시아버지 심산은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응교가 시집을 가 심산을 처음 본 것도 대전형무소에서였다.

1939년 출옥한 심산은 울산 백양사에서 요양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심산을 돌본 사람도 응교였다. 그런데 심산은 자신과 장남의 독립운동도 모자랐던지 1943년에는 둘째 아들 찬기를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에 보내어 독립운동을 하도록 했다.

이 때 찬기와 응교사이에는 자녀가 둘 있었다. 남편 찬기는 중경으로 떠나는 날 “이제 우리들 사이에 자식이 둘이나 있으니 내가 오지 않더라도 아이들하고 같이 살 생각을 해라. 나는 3년 뒤면 돌아올지 모르나 앉은뱅이가 된 아버지가 걱정이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지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응교는 남편을 찾아 만주를 헤매었지만 만나지 못했고 결국 남편은 해방 후 백범 선생이 귀국할 때 유골을 가져와 지금은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혀 있다.

응교는 해방 후에도 두 자녀들과 함께 경북 성주에서 심산을 모시고 살았다. 필자는 심산 평전을 연재하면서 5~6년 전까지만 해도 응교 할머니와 통화를 했다. 이 때 이미 그는 말을 잘 듣지 못해 내가 전화를 걸면 옆 사람에게 바꾸어주었지만 몸은 건강한 것처럼 보였다.

이후 안부가 궁금해 2015년 성주를 찾았더니 할머니는 서울 요양원으로 가고 없었다.

할머니의 부고를 받은 때가 지난해 12월30일이었다. 그는 타계한 후 남편의 무덤이 있는 대전현충원에 합장되었다. 이날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입암에 있는 할머니 생가에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간판을 걸자는 의논을 했다.

실제로 입암에는 할머니 생가가 아직 잘 남아 있다. 이 집은 응교의 생가이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던 응교의 부친 후익과 할아버지 진수 어른이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 집은 심산이 군자금 모금을 위해 울산으로 오다가 언양에서 차 사고로 크게 다쳤을 때 왜경 몰래 심산을 모셔다 두 달 동안이나 응교를 비롯한 후익의 가족들이 심산의 대 소변을 받아내면서 치료를 했던 독립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이 집이 독립운동가 집이라는 간판을 세우는 일은 가족들보다 먼저 울산보훈지청에서 앞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일송 김병희도 100살까지 살다가 올해 3월30일 운명했다. 1918년 울산군 동면 일산진에서 태어났던 김씨는 대구사범 졸업 후 대학은 일본으로 가 규슈제국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대구사범을 다니는 동안 박정희 전 대통령과 친해 박 전 대통령이 5·16을 일으킨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는 박 의장 곁에 있으면서 국정에 참여했다.

당시 그와 박 전 대통령 관계는 최근 조갑제씨가 쓴 ‘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에 잘 나타나 있다.

“박정희는 5·16후 정권을 잡자 서정귀, 조증출, 왕학수, 황용주 등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 외에도 김병희를 주위에 데려다 놓고 조언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대구사범 단짝이었던 김병희를 은사 김영기 선생 회갑연에서 만나자마자 학창시절에 했던 장난대로 김병희의 귀를 잡아 비틀고는 식장까지 끌고 갔다. 반도호텔에서 최고회의 주최로 파티가 열렸을 때 당시 한약대학교 문리대 학장이었던 김병희도 초청을 받아갔다. 박 의장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박정희는 김병희를 발견하자 곧장 다가왔다. 참석자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주목하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김병희와 악수를 나눈 뒤 수행원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김병희는 나의 대구사범 동기인데 한양대학교 문리대학장이시다. 한 사람씩 인사드려라. 병희야 나 좀 도와줘’라고 말하자 병희는 ‘수학을 하는 내가 도울 일이 있나’고 말했다. 김 교수는 사양했지만 다음날 김용순 최고위원이 찾아와 학생문제담당 상임자문위원 자리를 권했다. 그렇게 해 김병희는 최고회의로 나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박 의장이 불렀다. 박 의장은 김병희가 집무실로 들어오자 대뜸 ‘이 자식아 한 건물 안에 있으면서 왜 자주 안 왔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병희는 ‘야 지금 여기 들어오는데도 두 시간이나 걸렸어, 별로 할 말도 없는데 시간이 아까워서도 자주 올수야 없지’라고 말했다. 박 의장은 부관을 부르더니 ‘지금부터 김병희 교수만은 무상출입시켜라’고 지시했다.”

일송은 이후 박 대통령에게 경부고속도 건설과 포항제철 건립을 조언하는 등 한 동안 박 대통령 측근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해방 후 잠시 여운형을 도운 일이 멍에가 되어 말년에는 일산동에서 칩거하다시피 살면서 세상을 등졌다.

일송은 해방 전후 울산인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필자는 그가 일산에 사는 동안 가끔 그를 방문하곤 했다. 그는 98세 때 까지도 자신의 손으로 타이프를 치면서 매년 <일송논집>을 발간하는 등 향학열을 불태웠다.

아들의 사업 실패로 말년에는 광주 딸집에서 기거했던 그는 운명할 때까지 논집을 발간했다.

당시 일송의 논집 발간을 위해 울산에서 광주까지 가 그를 만나곤 했던 남일인쇄 장병천(64) 사장은 “일송 선생이 돌아가시기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정신이 아주 맑았다”면서 “그는 특히 해방 후 울산의 좌익인물 활동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었는데 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지 않고 돌아가신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요즘 천전리 각석을 찾는 사람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 유적을 40여 년 동안 지켜온 박장국씨의 행적이다. 70년대 말 이곳에 들어와 기도원을 지은 후 기도생활을 했던 박씨는 얼마 있지 않아 집 앞 큰 바위가 귀중한 문화재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후 천전리 각석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했다.

1918년 울주군 두동면 은편 출신인 그는 이곳에 오기 전 부산의 부산진시장에서 큰 포목점을 운영했고 서울 말죽거리에서는 소를 많이 키웠다. 물론 그가 처음 이곳으로 들어 올 때까지만 해도 아직 천전리 각석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 반구대 암각화와 함께 천전리 각석이 귀중한 문화재라는 것이 알려지자 이를 탁본해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을 상대로 천전리 각석의 중요성을 알리고 이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올해 100살인 그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천전리 각석 입구에 앉아 방문객들을 맞았고 이곳을 지키는 문화 해설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4년 전 그동안 그를 수발했던 부인이 돌아간 후 아들 박상호 목사가 그를 돌보아왔는데 최근에는 박 목사가 건강이 좋지 않아 서울로 가면서 그는 양산에서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

그는 요양원 생활을 하면서도 천전리 각석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 최근 필자가 양산 요양원을 찾았더니 “지금처럼 비가 오지 않을 때 천전리 각석으로 들어가는 잠수교를 고쳐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불편 없이 천전리 각석을 구경할 수 있는데 걱정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는 “100살이 되었는데도 아직 아픈 곳이 없고 정신도 맑아 너무 오래 살 것 같아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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