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6)이미동과 가족들

▲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항일운동가 이미동씨의 사진

울주군 서생면 평동마을 출신으로
동래고보 시절부터 항일운동 펼쳐
왜경 피하려 폐결핵 환자로 연기도
항일 행적 1931~1936년 신문에 보도
해방후 좌익의 길, 가족들까지 고생
부산에 살다 경찰에 체포되고
부인이 삯바느질로 가족 먹여살려
두딸 “항일운동가 아버지 자부심”

이미동은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가장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그의 항일운동 행적은 동아일보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일제강점기 ‘적색소년회’ 회원으로 동구에서 항일운동을 벌였던 김병희 선생도 생전에 “이미동은 박두복, 김경술과 함께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항일 운동을 벌였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울산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해방 후 그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태어났던 서생 평동 마을에는 그의 항일운동 얘기가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다.

이씨는 1911년 서생면 대송리에서 부친 이득원과 모친 이영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집은 농토가 많아 부친이 머슴을 데리고 농사를 지을 정도였다.

이씨의 항일운동은 고교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동래고보를 다녔던 때가 1920년대다. 평동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이씨의 항일운동 얘기를 듣고 자랐던 지벽해(90)씨는 “이씨는 동래고보시절부터 항일 정신이 투철해 이유 없이 예비 검속을 자주 당했고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왜경이 그의 출옥을 막기 위해 재판을 미루는 등 각종 악행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고교시절 이씨의 항일운동이 얼마나 치열했나 하는 것은 이씨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다. “왜경은 이씨가 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운동을 벌이자 그의 집을 자주 찾아와 동태 파악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안 이씨가 한번은 왜경이 그의 집으로 오자 자신의 잇몸을 깨물어 피를 왜경얼굴에 뿌려 왜경이 혼비백산 도망토록 했습니다.”

지씨는 이어 “이씨가 당시 이런 행동을 한 것은 그가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라면서 “이 사건 후 왜경은 결핵이 전염될 것을 우려해 그의 집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학교를 떠난 후에도 항일운동은 지속되었고 그의 활동은 동아일보에 잘 나타나 있다.

이씨의 항일운동이 처음 보도된 것이 1931년 6월15일이다. 이날 동아일보는 ‘울산군 서생면 농민조합 간부가 울산경찰서에 검속되었는데 구속 이유는 농조 때문인 것 같다. 서생에서는 지난 12일에 이 모라는 폐륜 막심한 자를 조합에서 훈계한 일이 있고 이 자가 이번 사건과 관련되지 않았나 하고 주시하는 가운데 울산경찰서는 이미동, 송두현, 김두찬, 박선지, 김학도, 지용지를 구속 취조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폐륜막심한자’가 이미동이다. 일제는 강점기동안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조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조선인들을 ‘불령조선인’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폐륜 막심한 자’ 역시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1932년 9월에도 어업조합창립과 관련된 두 개의 기사가 실려 있는데 내용이 비슷하다.

▲ 이씨는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항일운동을 열심히 펼쳤지만 해방 후 좌익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그의 행적은 물론이고 사진 한 장 지금까지 공개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의 딸들이 아버지의 사진을 공개했다. 오른쪽 사진은 1935년 이씨의 부인 오음전(가운데)씨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이씨의 행적이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1935년이다.

이때도 두 번 보도가 되었는데 2월10일자 신문에는 ‘구정 벽두 6일에 경주형사대가 울산의 박상선과 이미동, 언양의 이동개, 동면의 박학규 등 4명을 검거해 압송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9월29일에는 다시 이씨가 ‘울산적색농조사건’으로 관계자 7명과 함께 부산검사국에 송치되어 검사의 취조를 받은 후 예심에 회부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그의 행적이 마지막으로 보도된 것이 1936년 6월28일이다. 이날 동아일보는 이씨가 ‘독서회 사건’으로 검찰에 회부되어 구속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독서회’는 책을 읽는 모임이 아니고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벌였던 전국적 애국지사의 모임이다. ‘울산독서회’는 1926년 창립되었는데 양봉근, 김문성 등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이 단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처럼 이씨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열심히 항일운동을 펼쳤지만 해방 후 좌익의 길을 걷는 바람에 그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마저 많은 고생을 했다. 그의 좌익 활동에 대해 자세히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단지 동구에서 우익으로 활동했던 김진수씨는 그의 자서전에서 ‘6·25 무렵 서생 면책으로 있던 이미동 집을 급습해 쌀 10가마니를 빼앗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방 후 이씨의 행적이 알려진 것은 최근이다. 필자는 이씨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정리해 2015년 울주문화원에서 발행하는 <울주문화>에 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본 그의 두 딸이 필자를 찾아왔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대부분 일제의 탄압으로 부모들이 일찍 돌아가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다. 그러나 두 딸은 온갖 풍상을 이기고 건강한 사회인이 되어 나타났다.

이미동은 부인 오음전 사이에 송자, 차운, 해자 등 3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중 아들 차운은 일찍 타계했고 송자와 해자는 살아 있다. 이씨가 해방 후 쫓겨 다닐 때 송자씨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고 해자는 아직 걸음마도 못했다. 이씨의 항일 운동은 자녀들의 이름에서도 나타난다. 둘째 딸 ‘해자(解子)’는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해 이씨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딸들에 따르면 이씨는 해방이 될 때까지 서생 농어민의 복지를 위해 서생에서 생산된 건어물을 신의주와 만주까지 가져다 팔았다고 한다.

이씨 가족들은 해방 후 부산 동대신동에서 살았다. 송자씨는 “당시 우리 가족들이 서생에서 먼 대신동으로 이사를 간 것은 매일 경찰들이 집으로 와 아버지의 행방을 밝힐 것을 요구하면서 어머니를 못살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가족들은 도망하다시피 대송동에서 쪽배를 타고 월래로 가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면서 “그 날은 달이 밝은 밤이었는데 제가 집을 떠나는 것이 싫어 하룻밤만 더 자고 가자고 어머니에게 말했다가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고 회상한다.

이 때 어머니 오 여사는 경찰들로부터 너무 구타를 당해 팔을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아버지도 일제강점기 고문을 많이 받아 손가락을 못썼다.

대신동에서도 이씨의 사회운동은 지속되었고 마침내 경찰에 체포되었다. 오 여사가 스스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것이 이 무렵이다. 오 여사는 젊었을 때 진주양잠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바늘 솜씨가 좋아 이후 삯바느질을 하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이후 이들 가족은 서면을 거쳐 양정으로 이사를 갔다. 이 때 송자씨는 경남여고를 다녔는데 양정에서 학교가 있는 수정동까지 매일 걸어 다녔다. 집안이 어려워 고교 졸업 후에는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야간대학을 다녔다.

이런 고생은 동생 해자씨도 마찬가지였다. 언니의 도움으로 중고교를 겨우 마쳤던 그도 직장을 얻은 후에야 야간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학창생활 동안 이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여름방학 때 남창 이모집을 찾는 것이었다. 이모가 남창에서 경성여관을 운영하고 있어 여름방학 때면 늘 이곳에 와 놀았다. 따라서 두 딸은 지금도 옛 남창 지리가 훤하다. 송자씨는 딸 둘이 캐나다에 있어 요즘은 한해의 절반은 캐나다에서 보내고 있다. 평생을 고생 속에 보내었던 어머니는 1974년 59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해자씨도 지금은 부산 영도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자매들은 그들이 어려운 가운데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버지가 항일운동가라는 자부심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 땅에 태어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던 아버지는 딸들에게 사진 한 장을 물려주었다. 1940년경 찍은 사진에는 이씨가 안경을 끼고 양복을 입었다. 이때는 그가 한창 항일운동을 벌일 때인데 당시로서는 대단한 멋쟁이다.

딸들은 지금도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리고 무덤이 있다면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하지만 이들 자매의 소원을 풀어줄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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