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 통해 北입장 강변했던 작년과 다른 태도

▲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참석차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 중인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8일(현지시간) 국제컨벤션센터(PICC)에서 열리는 아세안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마닐라 시내 숙소를 나서고 있다.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참석을 계기로 모처럼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6일 새벽 필리핀 입국 때부터 9일 아침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 자신을 밀착 취재한 각국 취재진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리 외무상은 9일 오전 5시30분께 공항으로 가기 위해 숙소인 마닐라 뉴월드호텔을 나서면서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수행한 북한 외무성 직원이 전날 발표된 ARF 의장성명을 비판하는 북측 입장을 담은 성명서를 취재진에 건넸다.

ARF 외교장관 회의가 열린 뒤인 지난 7일에는 저녁에 북한 대표단 숙소에서 리 외무상 기자회견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결국 리용호는 그날도 아무 말 없이 숙소의 취재진 옆을 그냥 지나쳤다.

대표단 대변인 역할을 한 방광혁 외무성 국제기구국 부국장이 리 외무상의 ARF 연설문을 배포하면서 기자들에게 몇 마디 했을 뿐이었다.

리 외무상이 지난 6일 필리핀 입국 직후 자신의 객실 근처까지 따라붙은 한국 기자의 질문에 “기다리라”고 짧게 답한 것이 나흘 동안 한국 취재진에 포착된 그의 유일한 ‘육성’이었다.

▲ 8일 오전(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의 '필리핀국제회의장(PICC)'에서 열린 아세안 50주년 기념식에서 리용호 북한 외무상(왼쪽)이 홀로 서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은 다른 참가자와 얘기를 하고 있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참석차 마닐라를 찾은 강 장관과 리 외무상은 방문 기간 최소 한 차례 얘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작년 ARF 때는 달랐다.

작년 5월 외무상이 된 뒤 국제무대 데뷔전 격으로 ARF에 나선 리용호는 작년 7월 26일 ARF 외교장관회의 후 회의장 1층 로비에서 10여분간 기자들과 회견했다.

그는 당시 북한의 핵보유 ‘정당성’을 강조하는 장황한 모두 발언을 한 뒤 8개 정도의 질문에도 답했다.

올해 ARF에서 보인 리용호의 ‘침묵’은 우선 평양의 ‘훈령’에 따른 것일 수 있어 보인다.

북미 간에 강대강의 첨예한 대치를 하는 가운데, 외교 책임자가 대외적으로 말을 아끼는 편이 강경한 입장을 부각시키는데 도움된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리 외무상이 언론에 선전전을 펴도 실효성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추정도 나온다.

지난달 연쇄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도발에 대한 고강도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 채택 직후 열린 이번 ARF에서 리용호가 직면해야 했던 ‘고립’과 연결짓는 시각이다.

실제 이번 ARF 기간 그나마 ‘비빌 언덕’이 되어줬던 동남아 국가 외교장관들까지 자신과의 개별 양자회담을 꺼렸고, ‘혈맹’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회담에서 ‘더 이상 도발을 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를 던졌으며, ARF에서 북측 연설에 호응하는 장관은 사실상 한 명도 없었다.

ARF 사정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리 외무상은 작년에 데뷔무대였던 ARF에서 의장성명 내용 변경을 시도했다가 실패를 경험한 뒤 아세안에서도 자국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올해는 ARF 직전 아세안 국가들의 고강도 북핵 관련 별도 성명 발표, 안보리 신규 제재 결의 채택, 미국의 북한 ARF 자격정지 거론 등이 겹친 데다 ARF 기간 아세안 국가들이 개별 회담까지 거부하자 총체적 고립감을 느꼈을 것”이라며 “체념한 나머지 기자회견을 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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