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최...학술세미나 11일 경주서 개최

▲ 경주시 인왕동 월성 C지구 건물지 발굴조사 현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최
학술세미나 11일 경주서 개최
삼국사기부터 조선 문학까지
폭넓은 시대의 사료 통해서
핵심적인 유적의 가치 재조명

신라의 왕경(王京)이 있던 곳, 경주는 요즘 1000년 간 존속했던 왕도의 모습을 일부나마 되찾기 위한 움직임이 분주하다. 경주시와 문화재청이 3년 전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추진단’을 구성, 2025년 완공을 목표로 총 사업비 945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가 11일 오후 1시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신라 왕경 연구 기초자료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신라의 왕경은 당시 세계도시로 주목받는 곳이었다. 삼국통일 이후 동아시아는 물론 멀리 서역까지 교류하며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특히 8세기에는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중국의 장안,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바그다드와 더불어 세계 4대 도시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다.

왕경 지역은 지금의 경주시 노동동·노서동·황남동·황오동·성내동·성건동·성동동·동부동·사정동·탑동지역과 북쪽의 동천동 일부, 동쪽의 구황동·보문동 일대로 추정된다. 궁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월성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구황동사지·미탄사지 등 사찰이, 서쪽에는 고분이 주로 형성 돼있다.

월성의 동쪽 담장에 잇대어 남북으로 뻗는 왕경대로(王京大路)는 너비가 23m나 됐다. 황룡사지(皇龍寺址) 남단에서는 문무왕대에 확대된 월성의 북단을 거쳐 동서로 연결되는 대로도 확인된다. 15.5m 폭이다. 왕경 전체는 이처럼 크고 작은 격자식 도로가 축설돼 있었는데, 이는 바둑판 형태의 방(坊·160m×140m)과 더불어 1000년 전 신라 왕경이 현대사회의 도시계획인 가로(街路) 체계로 형성돼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전성기인 9세기 말 경주에는 1360개의 방(坊), 17만8936호(戶)가 존재했고 90만 명 이상이 모여 산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30여 채의 금입택(金入宅)은 ‘금을 입힌 집’이라는 뜻으로, 왕경 내 귀족들의 호화스런 생활을 짐작케 한다.

이번 세미나는 월성과 황룡사, 동궁과 월지, 월정교, 대릉원, 방((坊), 첨성대 등 신라 왕경 핵심유적들의 가치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만 의존하지 않고 고려와 조선조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대와 사료를 통해 살펴본다는데 의의가 있다. 박윤정 연구관은 “월성과 신라 왕경에 관심있는 누구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관련 연구가 더욱 체계적이고 심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054)777·5205.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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