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삼국시대 울산의 모습

▲ 울산 중구 반구동 유적에서 발견된 목책. 견고한 목책을 통해 당시 반구동 일대가 항구기능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수심 깊어 큰 배 출입 쉽고
신라 왕경과 거리도 가까워
중구 반구동 유적 토대로
당시 일원 바닷가로 추정

중구를 제외한 4개 구·군이 동해와 접하고 있는 울산은 일찍이 외부 세계와 접촉을 했다. 중공업과 자동차의 수출 전진기지인 울산은 이미 오래 전 삼국시대부터 바다를 활용해 다양한 물자들이 들고나던 국제적 항구도시였다.

당시 울산만은 파도가 잔잔하고 수심이 깊어 큰 배가 드나들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었으며, 신라 왕경까지의 거리도 멀지 않아 평지로 물자를 수송하기에도 그만이었다.

삼국시대 신라의 기록에 따르면 눌지왕 때 박제상이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날 때 율포를 이용했다. 율포촌은 현재 울산 태화강 하류와 북·동구 일원에 해당된다. 박제상이 신라를 배반한 것처럼 가장하고 비밀리에 떠나면서 율포촌의 한 항구를 이용했다.

삼국시대 유적들을 통해서는 지금과 당시의 자연환경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중구 반구동은 지금 육지이지만 삼국시대에는 바닷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유적지가 반구동 303번지 일원으로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태화강과 경주에서 흘러오는 동천이 만나는 곳이었다.

유적에서는 목책과 토성, 건물지, 구덩이 유구, 도로 유구 등 100여개가 넘는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유구가 발견됐다. 그 중에서도 자연 암반을 가공해 건물의 초석을 만든 누각은 당시 바다와 강을 조망하기 좋은 장소에 세워졌다. 목책으로 견고하게 세운 누각은 청해진 방어 및 접안시설로, 주거와 방어를 위한 성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항구와 관련된 기능까지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삼국유사>의 동축사 창건 설화에 인도의 아육왕(아소카왕)이 보낸 배가 하곡현 사포에 닿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배 안에는 황철과 황금이 대량으로 실려있었는데, 이는 황룡사에 장육존상을 만들기 위해 들여온 것이다. 이처럼 신라의 중요 항구였던 사포는 현재까지의 고고학 발굴 성과로 볼 때 반구동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포는 6~7세기 신라의 중요 관문으로 각종 항만시설을 토대로 외교와 무역을 담당, 그 역할과 기능은 이후 조선 초기까지 유지됐다.

울산에서 생산된 배와 자동차, 석유화학 제품들은 여전히 울산 앞바다를 통해 세계 각국으로 수출된다. 삼국시대 번창했던 항구의 기능이 1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정리=이우사기자
   <울산을 한 권에 담다> 참고.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