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조선시대 국방도시 울산

▲ 고려 말 1390년에 군사목적으로 축조된 언양읍성은 최근에 남문과 남문루인 ‘영화루’가 복원됐다.

고려때부터 왜구침략 잦아
임진왜란·정유재란 격전지
1597년 12월 울산왜성 전투
전쟁 종결에 결정적 역할

울산은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이자 군사요충지로 국방도시의 기능을 담당했다. 이에 앞서 고려시대에도 왜구의 침입이 잦아 개운포성, 언양읍성이 축조됐으며, 왜군이 쌓은 서생포왜성 등이 치열했던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고려 말기인 14세기께 한반도 전체에 왜구가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삼남(경상, 전라, 충청) 모두가 피해를 입었지만, 특히 울산의 피해가 컸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새로 부임한 울주(울산) 군수가 울산에 들어서지 못하고 하급관리를 보내 다스리는 형편이었을 정도다.

이에 황폐화된 울주 고을의 피해를 막고자 1385년에 군사주둔지 역할을 하는 치소성이 개축된다.

울산에 육군 군진이 처음 들어선 것은 1415년이다. 이와 동시에 울산군성을 새로 쌓는데, 이것이 나중에 경상좌도 병영성이 된다. 이후 1459년에는 부산포에 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영을 울산 개운포로 이전한다. 이는 경상좌도를 방어하는 육군과 수군의 최고사령부가 모두 설치된 것으로 울산의 군사적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19일 가토 기요마사가 왜군 2만여명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 당일 양산과 언양을 점령한다. 몇일 뒤인 22일에는 울산의 경상좌병영도 왜군에게 함락된다. 울산이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일부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의병과 관군이 유격전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때 윤홍명, 장희춘, 서인충, 서몽호 등 울산의병장들은 경주출신 의병장들과 연합해 왜군 격퇴에 나섰다.

이후 1592년부터 1593년 사이 이순신 장군을 필두로 한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위세가 수그러든 일본군도 숨 고르기에 나선다. 이때 울산에는 서생포왜성과 울산왜성이 축성돼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본거지가 된다. 하지만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왜군은 재침략에 육군 11만5000여명과 수군 7000여명을 동원, 조선의 잔류병력을 합쳐 14만여명에 이르게 된다.

당시 울산왜성에서는 1597년 12월22일부터 13일 동안 조명엽합군 5만여명과 왜군 1만6000여명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왜군 구원병이 도착하면서 울산왜성 공략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비록 연합군이 철수했지만 울산왜성 전투로 가토 기요마사가 도주하는 등 실질적인 왜군의 패배로 이어져 길고 길었던 전쟁 종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정리=이우사기자 <울산을 한 권에 담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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