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꺽감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고구려 문화를 빨아들였다. 고구려는 일찍 중국과 서역의 문화를 받아들여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면서도 자신의 전통도 소중히 했다. 꺽감은 거련과 함께 태학에 입학했다. 태학은 소수림왕 2년에 설립된 국립교육기관으로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이 배울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육기관이었다.

꺽감은 거련과 함께 무예인 마상술, 활쏘기, 창검술을 익혔고, 유교경전인 사서삼경과 중국의 문학작품, 고구려의 역사, 법,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학습했다. 꺽감의 학습능력은 뛰어나 태학의 박사들이 신동이라며 칭찬이 자자했다.

“감은부를 지었는데 다섯 살의 아이의 작품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감은부라는 시는 광개토태왕을 찬양하는 오언절구의 시였다. 고구려 태학에서 감은부라는 발제의 과장을 열어 시를 잘 짓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어린 꺽감은 당석에서 시부를 지었는데 뛰어난 문장과 딱 맞는 율이 태학박사들을 놀라게 했고, 이후 꺽감이 신동이라며 주위에 소문이 퍼졌다.

거련도 참석한 과장에서 미천한 정복지의 가야장군 아들이 감은부를 지어 상을 받은 것은 많은 고구려인들의 질투심을 불러 일으켰다. 꺽감은 멋도 모르고 아버지를 죽인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찬양한 감은부를 짓고 칭찬을 받았지만, 고구려 천하의 국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고구려인들은 변방에서 미천한 가야아이를 질시의 눈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어린 거련과 꺽감, 상희와 다희는 어른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며 지냈다.

제 맘대로인 상희는 꺽감을 드러내놓고 좋아한다며 따라다녔다.

“꺽감 오빠, 난 꺽감 오빠가 활쏘기 할 때가 제일 멋있어. 다른 건 하지 말고 활만 자꾸 쏴.”

“팔이 아파.”

“아파? 내가 호 해 줄게 이리와. 그리고 난 커서 오빠한테 시집갈 거야.”

“고구려 공주가 가야 사람한테 시집오면 안 될 걸.”

“내가 시집가겠다는데 왜 안 돼? 반대하는 사람은 내가 다 죽여 버릴 거야.”

상희는 공주답지 않게 선 머슴애처럼 구는데다 꺽감을 오빠라고 부르면서도 마치 동생처럼 다루었다. 상희는 간섭하는 것만큼이나 꺽감에게 귀한 먹거리를 곰상스럽게 챙겨주고 값비싼 선물도 했다. 하지만 상희가 자기의 수말하고 마방의 암말하고 접을 붙여 망아지를 얻자며 부랄이 덜렁덜렁한 수말을 몰고 올 때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꺽감은 백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숙위궁으로 자주 놀러갔다. 거기엔 볼모로 잡혀온 백제공주 다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결이 가무잡잡하고 성격이 보리처럼 억센 상희와 달리 다해는 얼굴이 해끔하고 피부가 쌀알처럼 투명하게 비칠 정도였다. 눈이 크고 다소곳해 질자로 끌려온 남자애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꺽감도 다해를 보면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하지만 백제공주 다해 곁에는 늘 거련이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우리말 어원연구

보리. 【S】vrihi(브리히). barley. 우리말, 산스크리트어, 영어의 어원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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