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소꿉놀이, 전쟁놀이, 사냥놀이에서 다해는 거련태자의 공주였고, 상희는 꺽감의 공주였다. 하지만 꺽감은 왠지 상희가 부담스러웠다. 태왕의 딸이자 거련의 여동생인 상희와 자신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련과 함께 뒹굴다가도 꺽감이 위로 올라가면 지켜보던 호위무사들이 ‘저, 미천한 것이 감히 태자를.’ ‘저 미개한 가야자식이’라며 수군거릴 때는 거련과 상희는 동무가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고구려의 왕자와 공주였다.

꺽감은 상희의 눈 밝은 감시에도 불구하고 다해를 보러 백제 숙위궁에 자주 갔다. 꺽감은 억센 상희의 간섭이 심할수록 다해 같은 고즈넉한 소녀상에 더 깊이 몰두하게 되었다. 쟁을 다루는 다해의 길고 가녀린 손가락이 줄 위에 뛰놀면 꺽감의 가슴도 마구 방망이질을 하며 뛰었다. 꺽감은 하늘에서 내려온 요정이 연주하는 하늘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아, 이 추운 고구려 땅에서 늘 찾던 가야의 따뜻한 집과 어머니의 품속을 이 쟁소리에서 느낀다.’

꺽감과 다해는 산뜻한 햇살이 비치는 숙위궁 대청마루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그날따라 다해는 꺽감에게 유난히 다정하게 굴었다.

“난 너가 여기 놀러와 줄 때마다 기뻐.”

“뭘, 나도 여기 오면 기분이 좋아.”

바람에 쟁그랑거리는 처마의 풍경소리는 주위의 고요를 더욱 깊게 했다. 그 소리는 꺽감의 그리운 마음을 울리는 소리였다.

“백제와 가야는 가까우니까 그렇지.”

“그래, 우리는 둘 다 볼모로 잡혀왔어.”

 

 

꺽감의 마음속으로는 ‘다해, 너가 있으니까 내 기분이 좋은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남몰래 짝사랑하는 구원의 소녀상이 한 명씩은 있지 않을까. 그녀만 있으면 이 지옥 같은 세상도 하늘나라로 바뀐다. 마음으로 음심을 품는 것조차 죄스럽게 생각되는 절대 순수의 소녀다. 꺽감은 늘 하얀 백제공주의 옷을 입고 쟁을 타는 다해를 그렇게 상상했다. 그런 은밀한 상상은 꺽감을 초라하게 하면서도 무한한 행복감에 젖게 했다.

다해는 쟁을 타면서 꺽감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보기란 노래로 남부지방 하기문의 민요였다. 다해와 꺽감의 목소리는 청실과 홍실처럼 두 음색이 엮여져 잘 어울렸다. 대청마루의 공간이 다해의 몸에서 울려나오는 쟁소리로 가득 차 꺽감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꺽감아, 너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

꺽감은 다해가 밤하늘의 별을 따달라면 별을 따줄 각오가 되어 있고 그걸로 목걸이를 만들어달라면 만들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우리말 어원연구

하기문: 지금의 전라도 남원, 상기문은 번암과 임실로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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