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자연인을 실현하는 길은
자연속에서 사는 것만이 아니라
지위고하 떠나 존중하며 사는것

▲ 김상곤 울산시 감사관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 민법에서 정하는 자연인이다. 자연인은 법률이 정하는 모든 권리 의무의 주체가 되고 행위의 책임이 귀속하는 주체라고 민법은 규정하고 있다. 자연인은 생활 속에서 필요한 의사결정의 주체가 될 뿐만 아니라 국가 존립의 근거가 되는 헌법 제정의 당사자로서 정치적 의사결정의 단위이다. 한 개인은 그가 가진 능력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고유한 존재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자연인이라는 말이 국가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나약한 개인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거나 세속을 벗어나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변형돼 사용되고 있다.

최근 재판에 회부된 어느 고위 공직자는 자연인으로 돌아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선언했다. 자기가 누리던 권력의 비호를 받지 않고 보통 사람과 같이 사법절차를 겪어 보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누구나 겪어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매우 힘들고 두려울 것이라고 미리 고백하는 말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 경우 자연인의 의미는 왠지 처량하고 어디 기댈 곳 하나 없는 가여운 의미로 쓰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 경우와는 조금 다르지만 오랜 직장생활을 순탄하게 마치고 퇴직하는 이들의 퇴임사에도 거의 빠짐없이 자연인으로 돌아가 제 2의 인생을 살겠다는 말이 등장한다. 앞으로의 생활을 직장이 주는 방어막 없이 한번 살아보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직장이 주는 방어막을 상실한다는 두려움은 단순히 경제적인 의미보다는 생활 전체의 패턴을 바꿔야 한다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이 경우에도 자연인이라는 말에는 여전히 개인이 가지고 있는 권리와 의무를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적극적으로 실현해 보겠다는 의지나, 오랜 짐을 벗어버린 편안함보다는 두려움의 냄새가 더 짙어 보인다.

퇴직을 목전에 둔 필자의 심정에 비추어 보아도 변화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와는 달리 자연인이 되는 것을 삶의 마지막 목표로 삼는 이들이 있다. 한국 중년 남성의 대부분은 이 부류에 속하거나 속할 가능성 높은 사람들이다. 중장년의 한국 남성이 무료한 시간에 TV 채널을 돌리다 멈추는 곳은 대부분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다. 세상의 풍파에 지쳐 세상을 등져 버린 도피성의 삶을 보면서 오히려 그들의 용기에 감탄한다. 오랜 세상풍파를 겪어낸 중장년의 사내에게도 세속을 벗어나 유유자적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더러는 자연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시도한다. 늘어나고 있는 교외의 전원주택단지가 그 꿈의 현장이다. 이들의 생활모습을 몹시 부러워하며 혹시나 나도 그 틈에 낄 수 있을까 하여 물어보기도 한다. 그토록 염원하던 자연인이 되었는가를. 대부분 긍정적인 면보다는 예상하지 못한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풀과의 싸움, 놀이문화 기회의 박탈 등등. 전원으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간절한 것은 자연의 질서에 따라 느리게 살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도 자연의 변화 속도에 맞추어 여유로워질 것 같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들이 산림속의 삶을 동경하는 것은 세상의 속도에 지친 까닭도 있지만 앞서 이런 생활을 실험한 이들의 저서가 끼친 영향도 만만치 않다. 데이비드 소로우가 미국 메사추세츠 월든 호수가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저서 <월든>은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스테디셀러로 읽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드 소로우가 전원으로 들어간 것은 소위 목가적인 삶을 실현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100년 전 이미 속도 경쟁에 들어간 미국의 문명에 대한 회의 속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저서 목차를 보면 대부분 계절의 변화와 주변의 자연,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이미 자연인이다. 자연인은 그 자체로 많은 가치를 함유한 개념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회 속에서 실현해야 하는 지향점이기도 할 것이다. 건강한 자연인을 실현하는 길은 단순히 자연 속에 사는 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마음의 속도를 늦추어 유유자적하는 것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자연인으로 태어나 자연인으로 죽는다는 것, 그리고 사성장군이나 이등병 같은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 자연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는데 그 길이 있을 것이다.

김상곤 울산시 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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