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울산 공업도시 첫 구상

▲ 일제강점기(1943년) 울산도시계획평면도.

일본인 이케다 총지휘 아래
대륙수송로·공업지대 육성
1930년대 말부터 본격 추진
대현면 개펄 매립 기공식도
日 패망으로 개발계획 무산

1962년 울산공업센터 특정공업지구 기공식 이후 울산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산업수도로 성장해 왔다. 한반도 남쪽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울산이 어떻게 공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울산의 공업도시화 가능성은 아이러니하게도 191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이미 예상됐다.

당시 울산개발을 총지휘한 인물은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였다. 1938년 10년간의 부산남항공사를 일단락한 그는 같은 해 부산축항주식회사를 설립하는데, 본격적인 울산개발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보인다. 이케다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한반도 및 만주개발로 인해 시모노세키와 부산항 사이의 물동량이 나날이 증가하는 것을 지켜보며 제2의 관부연락선을 구상했다. 특히 일본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며 한반도가 일본의 대륙병참기지 역할을 떠안게 되자, 울산을 개발해 대륙수송로와 생산공업지대로 육성하고자 한 것이다.

이케다는 <울산도시창설>에서 울산에 대해 ‘2000년 전 옛날, 약 1000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100만 인구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했던 신라 왕경 경주의 외항으로 번창함이 극에 달했던 항구’라고 소개했다. 그의 공장부지를 조성하기 위해 이미 1937년 대현면의 개펄(약 100만평)을 매립해달라며 허가원을 제출하기도 했다. 실제로 1943년에는 기공식이 열렸는데, 행사장은 지금의 중구 학성공원이었다.

이케다는 울산과 일본의 유야항을 동시에 개발하고자 했다. 그는 이 구간에 대해 기상상황이 좋고 조류가 느려서 안전항행이 보장되며 화차 수송도 가능하다고 했다. 게다가 한일간 최단거리인데다 두 항 모두 입구가 넓은 것도 강점이었다. 이케다의 큰 그림에는 염포 앞마다 매립지에 부두를 조성하고, 그 곳에서 병영까지는 새로운 철도를 부설하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었다.

방대한 스케일의 계획은 급속도로 추진됐으나 1945년 8월 일본 패망과 함께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다만,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20여년 후인 1962년, ‘울산공업센터’ 개발과 함께 다시 살아난 것이다. 정리=홍영진기자

<울산을 한권에 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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