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9)철마는 달리고 싶다

▲ 최근 들어 거처를 서울 인사동에서 부산으로 옮긴 울산 출신의 효재 이승민 화백(왼쪽)이 부산에서 자신의 대표작 ‘철마는 달리고 싶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울산 출신 효재 이승민 화백
중학교 졸업할때쯤 해방되자
부산 거쳐 서울 삼촌댁에서 생활
인사동 화랑 드나들며
청전 선생의 그림 어깨너머로 배워

우연한 기회 친척 도움으로 철원행
월정리역 반파된 열차 화폭에 옮겨
국방부에 그림 선사한뒤 유명해져
그림 재구성·인터뷰 요청 빗발
2012년엔 고향 울산서 전시회도

울산사람들 중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제목의 그림을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분단의 상흔과 민족의 한을 담아 잘 표현해 놓은 이 그림을 울산출신 화가가 그렸다는 것을 아는 울산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림의 대상은 6·25때 폭격을 맞고 멈춰 선 열차다. 이제는 더 이상 남북 어디로도 오갈 수 없는 녹슨 선로위에 종잇장처럼 무참하게 구겨져 있는 열차를 보면 아직 우리가 분단된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남북의 한이 서린 이 열차는 지금도 6·25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철원 월정리 역에 있다.

효재(孝齋) 이승민(李承珉) 화백은 70년대 이 그림을 그린 후 국방부 정훈국과 국회의사당, 서울역에 제공했다. 이 그림은 한동안 울산시청에도 걸려 분단 민족의 안타까움을 증언했다.

1935년 북구 염포동에서 태어났던 효재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6살 때 부모를 따라 병영으로 나왔다. 병영에 머무는 동안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향교에 있던 명륜중학을 다녔다.

 

중학을 졸업할 때 쯤 해방이 되었지만 병영에서는 먹고살 길이 없어 혈혈단신으로 찾은 객지가 국제시장이 있는 부산 부평동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궁핍한 삶을 면치 못했던 그는 야간열차를 타고 무조건 서울로 갔다.

서울에는 종로 삼촌 집에서 한 두 달 무위도식하면서 가까운 인사동 화랑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 무렵 청전 이상범 선생의 손녀 이인화씨가 인사동에서 화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청전 선생이 자주 이 화실로 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당시만 해도 청전 선생으로부터 그림을 배운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때였지만 선생님 곁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 밥만 먹여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말해 화실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미 청전은 우리화단의 중진으로 명성이 높아 정식 제자로 그림을 배우지 못하고 청전 선생이 그림을 그릴 때 어깨너머로 보면서 그림을 배웠다.

효재는 “요즘과 달리 그 때는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할 만큼 돈벌이를 하는 화가들이 인사동에도 많지 않아 저처럼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 못하고 언제 빛을 볼지 알지 못하고 구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이처럼 인사동에서 정처 없이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효재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안 가까운 친척이 그에게 철원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풍산금속에서 중역으로 있었던 이 친척은 풍산금속과 육군 제2사단이 철원에서 자매결연을 맺는다면서 함께 가자고 했다. 그 때만 해도 효재는 이 여행이 자신에게 큰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철원에서 자매결연 행사가 끝난 후 별을 두 개나 단 김을곤 사단장이 그와 풍산금속 간부들에게 철원의 명소를 보여주겠다면서 철원역과 월정리역 그리고 노동당 당사를 구경시켜주었다. 6·25때 미군의 포격을 맞은 이들 건물들은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효재는 월정리역에서 분단 비극의 전시물처럼 버려져 있는 열차를 보는 순간 이 열차를 화폭에 담고 싶었다.

“전쟁 전만 해도 수많은 승객들을 싣고 남북을 힘차게 오갔을 열차가 무용지물이 되어 녹슬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전쟁의 야만을 생각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월정리역은 잘 알려지지 않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열차 주위에는 남북 대치라는 한반도의 긴박한 상황과는 관계없이 적막이 감돌았고 잡초들이 무성했다.

분단의 비극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열차 아래 쌓여 있는 녹을 그림에 합성하는 것이 좋을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열차의 녹을 따로 그릇에 담았다. 잡초 무성한 열차 옆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간판이 있어 이 글을 그림의 제목으로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효재 선생이 고민했던 것이 분단의 한을 어떻게 실감 있게 표현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6·25전까지만 해도 많은 승객들을 싣고 달렸을 열차가 녹이 쓸고 적막한 철원에 있다는 자체가 이미 한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림에는 이런 역사적 내용과 한의 표현이 쉽지 않았다. 효제가 이 그림에 열차의 녹을 넣은 것은 이런 한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효재는 인사동 거리에서 혼합재료를 이용해 그림을 잘 그린다는 평이 나 있었다.

효재는 철원에 오기 전 이미 지면에서 이 열차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보는 열차는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인사동에서 그림을 그린 후 개인에게 팔지 않고 먼저 국방부 정훈국에 선사했다. 이후 국회를 비롯한 많은 공공기관에서 이 그림을 걸겠다면서 다시 그려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이 그림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KBS와 중앙일보 등 많은 언론매체에서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그 때마다 그는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그림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인터뷰 때는 좀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는 자신이 6·25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림이 감동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 작가의 그림은 작가가 살아 있는 동안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고 작가가 돌아간 후 적어도 50~60년이 지나야 올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효재는 재야 화가로 지금까지도 자신의 그림에 대해 스스로 가격을 매긴 적이 없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도 그림 값을 주는 대로 받았다. 이 그림이 국회의사당에 걸릴 때는 특별히 박관용 국회 의장이 고맙다는 인사를 해왔다.

일본 거류민단에서도 이 그림을 사무실에 걸어놓고 싶다고 해 보내었더니 예상외로 거금을 보내어왔다.

이 그림을 기점으로 효재는 그동안 주로 그렸던 묵화에서 벗어나 유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요즘은 인사동에서 유화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2012년에는 고향을 떠난 후 처음으로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그림에 유화 몇 점을 보태어 울산시내 중심가에 있는 투 더블유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이 때 울산의 많은 예술인들이 전시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동안 그림을 통해 울산을 전국에 알렸던 그의 높은 애향심을 고맙게 생각했다.

효재는 이후에도 자주 울산을 찾았다. 그는 울산이 공업도시로 상전백해가 되었지만 병영은 옛 모습을 지키고 있어 다행스럽다고 말한다.

얼마 전에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병영초등학교를 가보았더니 자신이 학교에 다닐 때 나무 그늘에서 앉아 놀았던 나무들이 아직 그대로 있어 반가웠다고 말한다. 그는 또 “병영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최현배와 고복수 선배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인줄 몰랐는데 어려운 객지 생활을 하는 동안 두 선배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알았다”고 말한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객지 생활을 하는 동안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그 때 마다 제가 ‘울산 병영’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현배와 고복수 선생님이 태어난 마을에서 왔구나 하면서 저를 기특하게 보아줄 때가 많았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몇 해 전 서울에서 부산으로 온 그는 처음에는 울산에 자주 들렸지만 이제는 건강이 좋지 않아 울산에도 자주 못 온다.

대신 오전에는 서면 영광서림 골목의 전통 찻집에서 지인들을 만나 차를 마시곤 한다. 최근 들어 남북 긴장이 고조되면서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그림과 관련된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은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아 장시간 인터뷰를 못한다.

어렵사리 이번 인터뷰를 주선했던 강정길 전 투 더블유 갤러리 사장은 자신이 울산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동안 최희, 박기태, 효재의 작품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공동 전시회를 여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효재 선생의 건강이 좋지 않아 앞으로 이 계획이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아쉬워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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