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5·6호기 공론화위 가동
화백·화쟁사상 전통 이어받아
모두가 수긍할 해법 도출해야

▲ 이근용 영산대 빅데이터광고마케팅학과 교수

사는 데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얼기설기 엉키고 부딪치며 사는 게 삶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나 겪는 갈등이지만 해법은 각기 다르다. 전통과 관습에 따라서, 논의와 협상을 통해 할 수도 있고, 권위와 힘에 의지할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합리적인 방법과 절차로 해결책을 찾아간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갈등의 요인은 더 많아지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숙의’이다. 사전적 뜻은 ‘깊이 생각하여 자세하게 여러 번 의논함’이라고 돼 있다. 여러 대안들을 깊이 생각해서 찾고,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상대방을 설득하고,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결론에 다다를 때까지 반복해 의논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두가 수긍하고 수용할 수 있을 때까지 논의를 거듭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최대한의 동의를 끌어내고, 합의에 이를 수 있을 때까지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숙의가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형식을 숙의민주주의라고 한다. 대의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 모두와 양립할 수 있으나 의사결정, 법을 정당화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 단순한 다수결이나 투표를 넘어선 실제적인 숙의라는 점에서 전통적 민주주의 이론과 다르다.

여러 나라에서 15년 이상 숙의민주주의의 실천적 이행을 설계해 온 제임스 피쉬킨은 숙의를 위한 필수 요소로 5가지를 제시한다. 모든 참여자들에게 자유롭게 이용되는 정보, 서로 다른 입장이 증거들에 기반해 비교되는 실질적 균형, 대중에 의해 제기되는 모든 중요하고 현실적인 입장들이 고려되는 다양성, 모든 논쟁들을 진지하고 신중하게 평가하는 양심성, 관점들이 증거에 기반해 평가되는 동등한 고려가 그것이다(위키피디아).

의사결정에 숙의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고전인 17세기 존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에서 분명하게 제기된 바 있다. 밀턴은 ‘사상의 자유롭고 공개적인 시장’에서 비교 평가를 통해 가장 지혜롭고 합리적인 사상이 선택될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공정성, 합리성, 관련 사실들에 대한 지식이라는 이상적 조건들이 보다 많이 채워질수록 보다 더 올바른 결정에 도달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숙의의 역사는 깊다. 신라시대 만장일치제 회의체로 알려진 화백회의는 그 연원을 고대 부족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부족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데 모두의 의견이 일치할 때까지 논의를 거듭한 부족 회의가 존재했는데, 신라가 부족연합국가로 성립하면서 6촌 귀족들로 만든 회의제도가 화백이라는 것이다. 한 명의 반대자가 있어도 의안이 통과되지 않는 전원일치 회의 체제로, 숙의의 과정을 거쳤음을 짐작하게 한다.

원효의 화쟁 사상도 화백회의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라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화백의 만장일치는 그저 하나의 의견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의견들을 고루 내고 조정하면서 합의에 이르고 마음으로 수긍해야 가능한 것이다. 의견들은 크든 작든 옳고 마땅한 점이 있었을 것이고, 설득하고 받아들이고 하다 보면 모두가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합치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원효가 부파불교의 혼란 속에서 “불교의 모든 법문들이 다 이치가 있으며, 다 이치가 있으므로 허락되지 않음이 없고, 허락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는 화쟁 사상을 펼치게 한 뿌리가 화백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신고리원전 5·6호기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공론화위원회가 가동 중이다. 일정이 다소 촉박하긴 하지만 숙의 요소의 조건을 갖추고 화백, 화쟁의 전통을 살려 모두가 수긍하는 해결책을 도출해낸다면 갈등 해결의 한 전범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공론화위원회가 소기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원전공사 중단을 찬성·반대하는 양측대표들과 시민참여단이 숙의의 과정을 거칠 수 있도록 장을 만들고 여러 조건을 갖춰주는 것이 중요하다. 원효의 일심(一心)으로, 증거에 기반해서 논의해간다면 만장일치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근용 영산대 빅데이터광고마케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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