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엉이 가족(송은효作) -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부엉이 가족들과 푸르름을 한껏 피워올린 풀과 꽃, 나무들이 감성적으로 교감하는 풍경을 통해 편안하고 행복한 한 때를 추억한다.

빗소리에 학교장시절 야영 떠올려
억수같은 소나기에 불어난 계곡물로
경황없던 날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뜨겁던 여름도 계절의 흐름에 가고
또 그렇게 반복되며 세월은 흘러갈듯

꼭하늘에서 사각사각 쌀가루를 뿌리는 듯한 빗소리에 잠을 깼다. 어둑새벽이다.

빗소리를 사각거린다고 하고나니 뭔가 이상하다. 흔히 알고 있는 비의 종류를 한 번에 하늘에서 떨어뜨린다면 어떤 소리일까?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를 상상하다가 그만 웃고 만다.

엄청나게 퍼붓는 비를 보고 ‘억수같이 내린다.’고 한다. 그 ‘억수’가 바로 비의 종류 중 하나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안개비’, ‘는개’, ‘이슬비’ 등과 같이 아름답고 착한 이름도 있지만 ‘장대비’, ‘억수’, ‘작달비’ 등과 같이 비가 만든 물보라에도 몸을 움츠려야할 정도로 소름 돋게 하는 억센 비의 이름들도 있다. 햇살이 환한 날 잠시 내리다 그치는 ‘여우비’를 비롯하여 ‘소나기’, ‘장맛비’ 등등 참 많은 이름들처럼 우리는 비의 세례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때론 야속하게도 그 이름들이 사라지면 지천(地天)은 온통 지독한 가뭄이라는 살벌한 풍경으로 바뀐다.

비에 관한 추억이 없는 이들 혹시 있을까? 비에 관한 기억 중 하나는, 산골의 지붕 두꺼운 초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큰 주전자에서 콸콸 따라 부은 막걸릿잔에다 마당 텃밭에서 뽑은 풋마늘을 뿌리째 씻어 장독대에서 떠 낸 거무칙칙한 된장에 찍어 동무들과 아작아작 씹던 얼굴 붉던 젊디젊은 날의 풍경이다.

비의 기억 속에는 교사시절 즐겨했던 야영(野營)이 자리하고 있다. 텐트를 치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태도를 기르는 야영이야말로 병적인 지식위주 교육의 모자란 부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한 해도 빼먹지 않았다.

계절이 그래서인지 야영은 늘 비와 함께였다. 억수 같은 빗속의 학교 운동장에서 무너지는 텐트 지주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던, 깜깜한 가야산 깊은 계곡에서 소나기에 불어난 거친 물소리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 낸 대견한 어린이들도 보았다. 이러한 행동의 근원에는 장소의 안정성과 악천후의 힘든 경험을 스스로 넘길 줄 아는 어린이들의 슬기로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울산동구의 학교장으로 재직할 때 일어났던 감당할 수 없었던 야영의 기억도 있다.

여름방학, 경상남도 거창수승대국민관광지에서 실시할 2박3일의 야영 출발일, 공교롭게도 서울의 교육개발원에서 열리는 각 지역 교육복지연구위원 회의가 겹쳐졌다. 두 대의 버스에 야영을 원하는 5학년 이상의 학생 80여명과 자기 차량으로 열여덟 분의 선생님이 동행하는 규모가 큰 야영이었다.

출장지에서는 ‘지금 쯤 대구를 지났을까? 많은 수의 텐트는 다 쳤을까? 늘 불안한 야외용 가스레인지는 잘 사용하고 있을까?’ 마음속은 온통 걱정뿐이었다.

일찍 자리를 떠 거창행 시외버스를 타고 야영지에 도착하니 저녁식사를 끝낸 어린이들은 선생님들과 어울려 내리는 땅거미 속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의 야영장은 까만 물감을 칠한 듯 어두웠지만 모처럼의 야영에 신이 난 어린이들의 웃음소리와 함성이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야영장에 있기를 고집했지만 선생님들의 권유와 울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거창으로 이어진 여정의 피곤 때문에 하나 있는 관광지 모텔에 방을 잡고 모로 누웠지만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이란 말처럼 밤이 늦도록 떠들어 대는 소리를 느끼며 깜빡 잠이 들었는가? 꿈결처럼 웽웽대는 소름끼치는 사이렌, 세찬 빗소리에 함몰되어 짐승울음의 바뀐 스피커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우선은 잠든 주인을 깨워 남은 방을 모두 빌리는 일이었다.

야영지는 국민관광지로 여름철엔 국제연극제가 열려 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지만 늦춰 잡은 날짜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숙소가 인원에 비하여 다소 비좁긴 해도 언제 소나기로 불어난 계곡물이 몰려 와 삼켜버릴지도 모를 위험성은 피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으로 야영장으로 뛰어 갔다. 어린이들은 텐트 안팎에서 웅성거렸고 대책을 논의하는 선생님들의 표정은 다급함이었다.

텐트를 관리할 몇 분 선생님들을 두고 모두들 숙소로 자리를 옮기자 이내 아침이었고, 야영장은 콸콸콸 쏟아지는 누런 물줄기 외에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했다. 열성적인 선생님들은 보슬비 오는 낮 내내 정해진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날 저녁, 이미 예약한 모텔에 단 한 명의 어린이들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아침을 맞았다.

지난 해 제18호 태풍 ‘차바’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던 울산지방은 올 들어 비가 오지 않는다는 한 시인의 전화는 간절했다. 내가 사는 중부지방은 지독한 가뭄 뒤에 이어지는 장마, 이러다가 비로 상징되는 여름은 끝날 것이고 가을, 겨울, 봄이라는 계절의 반복, 그렇다. 윤회(輪回)! ‘함께 흘러가자’면서 재빠르게 세월은 갈 것이다.

이제 빗소리는 잦아들었다. 비의 종류를 모아 한 날 한 시에 하늘에서 떨어뜨린다면 그 소리는 정말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비견(比肩)될 수 있을 것인가? 또 한 번 ‘피식’ 웃고 만다.

아침이다.
 

▲ 송은효씨

■ 송은효씨는
·개인전 8회(울산, 서울, 대구)
·아트페어 8회(취리히, 서울한가람미술관 등)
단체전 190여회
·한국미술협회, 울산미술협회, 울산구상작가회
·자작나무숲미술원장

 

 

 

▲ 김태수 시인

■ 김태수 시인은
·1978년 시집 <북소리>(詩人社)로 등단
·시집 <황토마당의 집>(실천문학)외 5권
·창작강의서 <삶에 밀착한 시 쓰기> 펴냄
·울산의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
·교정시설, 도서관, 박물관에서 문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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