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10)중국인 서예가 소봉 모전량

▲ 울산을 사랑했던 소봉이 1990년대 중반 지역의 한 언론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中 국민군-공산군 싸움 피해 한국행
1966년 화교학교 교사로 울산에 와
중국집·서예학원 운영하며 정착
서도회와 교류하며 문화발전에 기여
1981년 시립도서관 건립때 큰돈 기부
지역 사업가에 자금 선뜻 빌려주기도

해방을 전후해 울산에는 많은 화교들이 살았다. 화교들이 운영한 식당만 해도 신성원, 신생원, 북경원, 신려도 등 적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중국 음식은 ‘청요리’라고 해 울산의 부자들만 먹을 수 있었다. 울산의 많은 화교들 중 소봉(少峰) 모전량(牟傳良) 만큼 울산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면서 생활한 사람도 드물다.

그는 서화를 통해 울산 문화 발전에 기여했고 문화 활동을 통해 번 많은 돈을 울산문화 창달에 바쳤다. 그는 또 울산에 사는 동안 사업가들에게 돈을 선뜻 빌려주기도 했다.

이처럼 울산을 사랑했던 그의 모습이 최근 보이지 않자 그의 행적을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봉은 한국과 가까운 중국의 안태에서 1929년 태어났다. 그가 성장을 했을 때 중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보니 소위 ‘국공’이라해 국민군과 공산군의 싸움이 중국 대륙을 휩쓸었다. 이 내전은 평화로운 해안 도시 안태까지 덮쳤다. 따라서 안태마을 청년들은 국민군으로 입대를 하든지 공산군이 되든지 선택을 해야 했다. 소봉 역시 이를 두고 고민하다가 부모들의 권유로 이도 저도 아닌 한국행을 택했다.

소봉이 서울 친척집으로 향한 것이 1946년이었다. 이때 그는 산동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거쳐 서울로 왔다. 부모의 전송을 받으면서 고향을 떠났던 그는 내전이 끝나면 곧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그의 꿈은 중국 땅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망향의 한을 안고 한국에서 살아야 했던 그의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 장벽이었다. 한국어라고는 한마디도 못했던 그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울 친척 집에서 일 년간 무위도식했던 그가 호구지책을 위해 찾은 곳이 충북 음성이었다.

음성에서는 친척의 권유로 가게의 물건을 배달했으나 얼마 후 자신의 사업을 하겠다는 욕심으로 다시 서울로 왔다. 그가 이런 욕심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음성에 있는 동안 한국말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 소봉 모전량이 교장으로 근무했던 북정동의 화교학교는 2005년 문을 닫은 후 지금까지 빈 채로 있으며, 북정동 일대의 재개발로 곧 사라질 운명에 있다

소봉은 한국어가 존경어와 비어가 달라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중국어도 존칭이 있지만 존칭어와 비어 사이의 어휘차이만 있을 뿐 한국어처럼 상대방에 따라 존칭어와 비어를 구분해 쓰지는 않기 때문에 어휘 차제가 까다롭지 않다는 것이다.

음성에서 서울로 왔지만 곧 6·25가 터지는 바람에 아무런 사업도 할 수 없었다. 전쟁을 피해 중국에서 한국으로 왔는데 한국에서 다시 전쟁을 만난 셈이다. 이후 청주로 가 대학을 졸업한 후 청주화교 소학교 교사로 활동하다가 제천으로 가 재천 화교 소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장사를 하기 위해 서울로 왔지만 큰 돈을 벌지 못했다.

장사에 관한 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보다 오히려 상술이 좋아 한국에서 중국인들이 돈을 버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했던 그가 울산에 온 해가 1966년이다. 이 무렵 학성동 울산역 앞에 있었던 울산화교 소학교가 북정동으로 이전하면서 교사가 부족해 소봉을 초빙했다. 당시만 해도 울산에는 화교들이 많아 학생수가 70여명이나 되었다. 70년대 초에는 교장직을 맡기도 했지만 차츰 학생 수가 줄어들자 3년 뒤 학교를 떠났다. 이때까지도 그는 울산에서 이방인이었다.

울산사람들과 본격적으로 사귀게 된 것은 옥교동에 천성반점을 열면서다. 당시 식당 단골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의외로 울산사람들이 서화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이들과 곧 친해졌다.

소봉이 서화에 일가견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울산 서예인들이 천성반점을 자주 찾았다. 이무렵 그는 아예 공업탑 로터리 인근에 서예학원을 열고 한국인들을 상대로 서예를 가르쳤다. 당시 이 학원을 자주 찾은 사람이 김재호 박사와 류활열씨다. 둘은 이 무렵 울산에 서도회를 창립해 부산의 청남 오제봉 선생을 초빙해 서예를 한창 배울 때였다. 이러다 보니 청남 선생 역시 천성반점을 자주 찾아 소봉과 환담을 나누면서 배갈을 마셨다.

이후 소봉은 화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광주로 가 의제 허백련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울산으로 와 의제의 화법을 많은 울산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울산 서도회 회원들이 여러 번 광주를 방문해 친선 전시회를 열었다.

류활열씨는 소봉의 글씨가 “글과 그림이 조화를 잘 이루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평정을 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한다. 이 무렵 소봉은 국전에 여러 번 입상했다.

1981년 울산시가 시립도서관 건립을 위해 기금 마련에 나섰을 때는 ‘소봉 모성수 서화전’을 열고 자신의 그림과 기증 작품을 팔아 모은 450여만 원을 당시 이순동 시장에게 전달했다. 이런 선행으로 그는 이 해 울산시 명예시민이 되었다.

그는 강원도에서 울산으로 와 공구장사를 하고 있던 김종만씨와 친하게 지냈다. 울산이 객지였던 김 사장은 사업을 시작하면서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그를 도왔던 사람이 소봉이었다. 김 사장은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내가 울산에 와 사업을 시작하면서 돈이 부족해 어려움이 많았는데 이 때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이 우원상사를 운영했던 류활열씨와 보광사 윤희태 사장 그리고 중국인이면서도 동양화가였던 소봉이었다”면서 “특히 소봉은 아예 통장과 도장을 나에게 맡겨 놓고 돈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찾아 쓰라고 할 정도로 나를 믿고 도와주었다”고 회상했다.

울산에서 생활이 안정된 후 그가 처음으로 고향 안태를 찾은 것이 이산 34년만이었던 1983년이었다. 고향에 갔을 때는 부모님이 아직 살아 있어 기뻐했다. 물론 생활은 어려웠지만 30여년 전 헤어져 안부조차 몰랐던 부모와 자식이 만났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상한 것은 고향사람들의 눈치였다. 어릴 적 친했던 친구와 친척들까지도 그를 이방인으로 대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안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권에 있었던데 반해 소봉은 대만정부의 중화민국 국민이었으니 친구와 인척들이 그를 외면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중국과 대만은 오늘날 우리나라 남북처럼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흔히들 이민을 가지 않는 한 국적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봉은 자신도 모르게 한국에 사는 동안 국적이 바뀌어 고향에서 분단민족의 비극을 절실히 느껴야 했다. 이후에도 그는 안태를 자주 찾았지만 국적이 대만이 되어 동족의 예우를 받지 못했다.

그는 중국에서 돌아온 후 한국 사람들로부터 한국 귀화를 자주 권유받았다. 그러나 소봉은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외국에 나와 있는 중국인이 중국 국적마저 포기하면 중국인의 특색이 없어진다”면서 “외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이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애국이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소봉은 한국에 사는 동안 4남 3녀를 두었는데 이들이 현재 한국과 대만 그리고 미국에 살고 있다. 수구초심이라고 했던가. 소봉도 80이 넘으면서 울산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안태를 자주 오가다가 나중에는 부산에 있는 장녀 유리 집에서 오랫동안 기거했다.

이후 건강이 좋지 않자 대만에서 부부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둘째 딸 유희 집으로 가 현재 이곳에서 요양중이다. 소봉은 울산을 떠났지만 그의 글은 아직 울산에 많이 남아 있다. 농소의 학성 이씨 재실 한천재와 양정의 문화류씨 재실 만풍정의 현판과 주련이 소봉의 글씨다. 또 은을암 아래 ‘비홍산방’ 글도 그의 솜씨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소봉이 교장으로 있었던 울산화교 소학교는 학생들이 줄어들면서 2005년 문을 닫았다.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이 학교 건물은 중국인 소유가 되어 지금까지 10여년 넘게 빈 건물로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학교 일대가 재개발 사업에 들어가 이 학교 역시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다.

그동안 울산의 화교 숫자도 많이 줄어들었다. 해방 전 후 400~500여명이나 되었던 화교들의 숫자가 지금은 40~5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실제로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식당도 신생원, 신천지, 영안반점 등 많지 않다.

울산에는 소봉이 울산을 떠난 후 그에게 글을 배웠던 류활열 씨 등 울산서도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소봉 선생을 기리는 ‘소봉 서화 연구회’를 만들어 소봉의 글을 연구하고 있다. 이들이 곧 병문안차 대만을 다녀올 계획을 세우고 있어 소봉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이들이 대만을 다녀온 후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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