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끝)사랑하는 울산의 성곽

 

한반도의 동남해안에 위치
외세 침입과 교류의 창구 역할
정치·사회적 입지적 특성 고려
문무 겸비한 굳센 기질은 당연

입지상 성곽 조성은 필연
신라 수도 경주의 남동쪽 해안
반구동 토성·계변성 등 축조돼
조선조 경상 총괄 군부대 설치

역사문화 유산 ‘성곽도시’
지역내 성곽수 30개소 내외
마성·진성·왜성 등 종류 다양
성곽유산 보존·홍보 과제로

고대로부터 한반도의 동남해안에 위치해 외세 침입과 교류의 창구가 되어 왔던 울산의 정치·사회적 입지성을 보면, 위와 같은 기질의 발현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임진왜란과 같이 무력으로 침입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교류를 가장해 돌변할지도 모르는 이국 상선(商船) 등의 외세를 염두에 두면, 울산사람들은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전승되어온 이와 같은 분위기는 마치 유전자처럼 울산사람들에게 강인함으로 누적되었고, 그것을 바라본 외지인들은 울산사람들에 대해 ‘무예를 숭상하고 강하며 굳세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울산사람들의 기질마저 만들어낸 울산의 입지는 자연스레 성곽의 조성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사료된다. 신라 수도 경주의 남동쪽 해안에 위치해 관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은 반구동 토성과 계변성, 관문성 등의 축조 결과를 낳았고, 고려시대에 들어서 비록 지방의 고을로 전락한 경주(동경)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중요성이 유지되었음을 감안하면, 울산의 역할 또한 그 성격이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신라 때의 계변성 등 여러 성곽은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한동안 그 주체가 바뀌었을지언정 역할은 그대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울산의 입지적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어 급기야 경상좌도를 총괄하는 군부대로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이 지금의 중구 병영에 설치되고 성곽 또한 마련되었다. 그것이 바로 ‘울산 경상좌도병영성’이다.

현재까지 울산지역에서 알려진 성곽의 수는 개략적인 것을 포함해 30개소 내외이다. 단위면적당 분포수로 보면, 전국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울산에 대해서 ‘성곽도시’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수(數)가 많다는 단순한 해석만으로 한 도시의 정체성을 언급하기에 다소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성곽도시 울산’을 표방하기 위해서는 ‘울산의 성곽’ 속에 내재된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많은 수(數) 못지않게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 주목된다.

울산과 언양에 치소(治所)의 성격으로 만들어졌던 울산읍성과 언양읍성, 그리고 신흥산성 등 울산 도처 산지의 골짜기나 봉우리를 감싼 여러 산성들, 722년 경주지역 방어를 위해 울산과 경주를 경계로 산을 따라 막아 세운 장성(長城)인 관문성, 경상좌도를 관할하고 방어하기 위해 세운 병영성과 수영성(개운포성), 조선 최초의 석보(石堡)인 유포석보, 울산의 해안에 거점을 삼고 바다의 적을 막아내기 위해 쌓은 수군들의 진성(鎭城), 바다로 돌출된 곶(串)을 이용해 말과 여러 가축을 기르기 위해 쌓은 마성(馬城)을 비롯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일본군들이 쌓은 왜성(倭城)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해 울산의 성곽은 한마디로 ‘성곽의 표본실’ ‘성곽의 박물관’ ‘성곽의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울산에 오면 성곽을 종류별로 모두 만나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울산은 그 수가 많기도 하지만, 종류도 다양해 어떠한 점에서도 ‘성곽 도시, 울산’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여러 복잡하고 다난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우리들의 선조들과 그들이 겪어온 과정 속에서 이러한 성곽들이 울산에 만들어졌고, 그것은 역사문화유산으로 우리들에게 남겨졌다.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이러한 성곽유산들을 어떻게 보존하고 가꾸어 나가야하는가의 과제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 때는 건장했던 성곽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무너졌고, 또 어제도 오늘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지금 보면, 한 때의 영화(榮華)가 사라지고 폐허의 모습으로 가만히 남아 이대로 영원할 것 같지만, 또 세월이 지나면 그 또한 더욱 초췌한 모습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간혹 무너져 있는 현재의 성곽 모습을 ‘폐허의 미학’의 관점으로 보며 ‘이대로가 좋다’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여전히 무너짐의 진행형이다.

폐허가 좋으면 좋은데로, 정비해서 좋으면 좋은데로 이제 하나둘 결정하고 명확한 활용과 정비의 개념을 적용할 때가 되었다. 지금 세대가 아니면, 다음 세대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임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울산의 성곽은 그 역사문화자원의 가치가 부각되고 있는 지금부터하도 관심과 사랑으로 활용을 시작해야 한다. 울산의 성곽은 정말이지 울산다움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유산임에 분명하다.

◇‘성곽도시 울산’ 시리즈를 마치며
울산의 성곽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몇 년에 걸쳐 글을 적으면서 몇몇 부분에서 해당 연도(시기)의 오류도 있었고, 여러분들이 판단하실 때 지나친 해석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는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부끄러움이 그지없고, 그에 대해 독자님의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린다. 울산의 모든 성곽을 다루지는 못했지만, 유형별로는 한 개소 이상은 다룬 듯해 그나마 위로를 삼는다. 끝으로 도처에 산재한 울산의 성곽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주실 것을 거듭 부탁드리며 긴 글을 마무리한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