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고국천왕 13년(191년)에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최근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 뇌물로 벼슬자리를 매매하고, 무능한 자가 아부하여 관직에 있어 인재는 출사하지 못하고 인품이 훌륭한 자는 경멸을 받고 있다. 너희 신하들은 4부로 하여금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라.”

고구려에는 계루부, 연나부, 소노부, 관나부, 환나부 다섯 부족이 있었다. 왕실인 계루부를 제외한 4부에서 인재를 추천하라고 했던 것이다. 4부의 사람들은 환나부 출신의 안유를 추천했다. 안유는 겸손하고 양보의 미덕을 아는 사람이었다.

안유는 고국천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저는 어리석고 협량하여 나라의 큰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저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인물이 있는데, 서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입니다. 학문과 지혜가 뛰어나고 덕망이 높으나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을파소를 등용해 주소서.”

고국천왕은 안유의 말을 듣고 신하에게 을파소를 찾아오라고 명했다. 신하는 서압록곡 좌물촌에 살고 있는 을파소를 찾아갔다. 을파소를 한창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신하가 을파소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을파소님을 부르셨습니다. 저와 함께 왕궁으로 갑시다.”

을파소는 논에서 나오지도 않고 모를 심으며 말했다.

“어허, 바쁜 모내기철에 오시다니. 요즘 국정은 문란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는데 제 같은 무지렁이 농사꾼이 왕궁에 가서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신하는 기분이 나빴다. 논두렁아재비 같은 농투성이 주제에 감히 대왕의 말을 거역하다니! 더욱이 자신도 왕궁에서 힘깨나 쓰는 신하인데 애써 먼 길을 찾아왔는데도 미천한 농부가 예의를 갖추지도 않고 논 안에서 일을 하면서 말하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을파소, 당신은 왕명을 거역한 역적이네. 다음번엔 형리들과 함께 당신을 잡으러 오겠네.”

신하는 왕궁으로 돌아가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고국천왕은 신하를 크게 꾸짖으며 다시 가서 을파소를 정중하게 모셔오라고 말했다.

신하는 다시 좌물촌에 가서 을파소에게 왕궁에 가기를 간곡하게 부탁했다. 을파소는 두 번이나 신하를 보낸 고국천왕에 마음이 흔들려 신하와 함께 왕궁으로 갔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

“선생이 마음을 고쳐 나라를 다스리는 데 참여한다니 내 마음이 참으로 기쁘오. 중외대부를 맡아 어지러운 나라를 잘 다스려 주시오.”

을파소는 왕에게 절을 한 뒤 말했다.

“대왕마마, 고맙기는 하나 중외대부직을 사양하겠습니다. 농사를 짓는 필부가 왕궁에 와서 용안을 뵙는 것만으로도 큰 광영입니다. 저는 다시 고향 시골로 내려가겠습니다.”

을파소는 재상 직인 왕이 수여한 중외대부직을 걷어차고 왕궁에서 나와 버렸다.

 

우리말 어원연구

환나부는 순노부라고도 한다. 3세기 중엽 이후 5부의 명칭은 방위명으로 개칭되었는데 환나부는 동부로 변경되었다.

재상은 오늘날 장관에 해당된다. 중외대부는 재상직임에도 실세가 아닌 다소 낮은 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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