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고국천왕은 세 번째 을파소에게 신하를 보내려 하자 대소신료들이 반대를 했다.

특히 우왕후의 외척인 국상 우보가 극력 반대를 했다.

“대왕마마, 한갓 시골 잡부에 불과한 을파소에 왜 그리 집착하십니까? 왕명을 거역하고 오만방자한 행위를 한 을파소를 당장 잡아 올려 하옥하소서.”

“아니다. 한번만 더 가서 을파소를 불러오너라.”

결국 을파소는 다시 왕궁으로 불려와 왕 앞에 섰다.

고국천왕이 말했다.

“을파소, 그대가 중외대부직을 거절한 까닭이 무엇인가?”

“중외대부직으로는 부패 관료를 내치고 힘 있는 계루부와 연나부의 귀족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을파소는 권력을 가진 왕실인 계루부, 왕비를 배출한 연나부에서만 관료들이 배출되어 서로 자파의 이익만을 위해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나부의 실력자 좌가려가 자신의 각종 비리가 밝혀져 체포될 지경에 이르자 오히려 연나부 병사들을 이끌고 왕궁으로 쳐들어와 고국천왕이 직접 진압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을파소는 왕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간파했고 중외대부라는 낮은 직으로는 왕이 원하는 인사개혁을 단행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명했다.

왕이 을파소에게 말했다.

“난 우선 그대를 시험해 보고 잘하면 국상으로 임명할 생각이었네. 하지만 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 생각이 짧았네. 국상으로 임명하니 나를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려주게.”

을파소는 하루아침에 시골농부에서 나라 최고의 관직인 국상이 되었다. 국상이 된 그는 부패관료를 숙청하고 전국에서 인재를 찾아 등용했고, 고구려의 교육제도를 확립했으며, 특히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진대법을 시행해 기근을 해결하였다. 농부였던 그는 음력 8월 가을에 곡식을 수확하면 봄철에는 양식이 떨어져 음력 3월에서 7월까지 가난한 백성들이 굶주리는 춘궁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춘궁기에 국가에서 식량을 빌려주어 10월에 빌려준 곡식을 되돌려 받는 진대법을 시행해 백성들의 기근을 항구적으로 해결하였다.

이 진대법 시행은 이웃나라에서도 소문이 나 외국인들이 굶주림이 없는 땅 고구려로 몰려들기도 했다.

광개토태왕은 거련과 꺽감에게 고국천왕과 을파소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준 뒤 물었다.

“나는 너희 둘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거련이 대답했다.

“왕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정확한 대답이야. 꺽감도 그렇게 생각하지?”

태왕은 만족하며 꺽감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예. 이야기를 들으면서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간 삼고초려가 생각났습니다. 인재는 귀하기 때문에 왕이 뜻을 굽히지 않고 등용해야 한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말 어원연구

진대법. 을파소의 진대법은 최초의 항구적인 구휼제도로서 왕안석의 신법(청묘법), 조선시대의 환곡제도 등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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