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태왕의 군영은 자모산맥을 넘어 대동강를 따라 마침내 평양에 입성했다. 태왕은 비빈과 중신들과 함께 평양궁에 들어가 긴 행군의 노독을 풀었다. 태왕은 평양을 중시해 즉위하자마자 평양성과 평양궁을 새로 중수하고 아홉 개의 절을 지었다. 평양은 예로부터 유서 깊은 고조선의 도읍이자 낙랑군의 군현으로 인구와 고루거각이 많고, 대동강이 서해로 열려 있어 중국과 왜와의 무역이 활발했고 시장이 번성하였다.

특히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죽음을 보복하기 위해 백제를 쳐야 했던 태왕으로서는 평양이야말로 병사를 징발해 집결시킬 수 군사적 요충지였다. 태왕은 평양 남쪽에 군사적 전진기지인 6성을 쌓고 징발한 군을 주둔시켜 언제든지 남방원정에 투입할 수 있도록 했다.

태왕이 평양에 입성한 지 달포가 되었을 때 신라의 사신이 서라벌에서 평양으로 급하게 달려왔다.

아리수 패전 이후에도, 계속 저항하는 백제 아신왕과는 달리 신라의 내물왕은 고구려에 납작 엎드렸다. 패전을 경험한 내물왕으로서는 백제, 가야, 왜를 전부 합친 것보다 고구려가 더 강하게 보였다. 고구려는 동북아의 패자인데다 광개토태왕이라는 걸출한 정복군주가 있어 저항보다는 조알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평양궁 대조전으로 달려온 신라 사신은 태왕에게 엎드려 숨 가쁘게 말했다.

“폐하, 지금 신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금관가야의 이사품이 왜의 용병과 함께 신라를 공격해 금성 이 함락 직전에 있습니다.”

“무엇이? 금성이 함락 직전에 있다고?”

“그러하옵니다. 일부 왜병은 금성에 진입해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있습니다. 계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 같아 폐하의 구원병 없이는 사백 년 신라사직이 사라질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마음을 진정하고 왜 갑자기 금관가야가 왜와 손잡고 금성을 치게 되었는지 설명해 보아라.”

사신은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 그간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번 전쟁의 배후에 백제의 아신왕이 있습니다.”

“음, 짐작은 했네만.”

아리수 패전 이후 백제의 아신왕은 와신상담하며 다시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하지만 고구려에 세 번이나 패한 아신왕은 성급하게 북진했던 과거와는 달리 한강 이북과 한산에 석성과 책성을 쌓고 대규모 군대를 징발하고 조련해 사열하는 등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고구려를 치기 위해선 후방의 대가야와 신라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백제군이 고구려를 치러 북상하면 대가야와 신라가 후미와 옆구리를 치고 들어올 게 뻔했다. 아신왕은 궁리 끝에 금관가야를 부추겨 고구려의 약한 고리인 대가야와 신라를 먼저 치기로 계획했다.

우리말 어원연구

아리수. 한강. 394년 아리수 대전에서 광개토태왕은 백제 가야 신라 왜를 쳐부수고 한반도의 사국통일 전단계를 이루었다.

금성. 경주. 경주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생겼으며 신라시대는 서라벌과 금성으로 고려시대는 동경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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