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11)김지향

▲ 1950년대 중반 울산에서 문학 활동을 하면서 후배 양성에 힘썼던 김지향 시인은 울산을 떠난 뒤에도 울산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다. 그가 1994년 발간한 시집 <밤, 별이 혼자 보고 있는>에는 ‘잘있거라 蔚山灣’이라는 울산을 배경으로 한 시가 담겨 있다.

젊은시절 결핵과 싸우며
서울서 기성작가로 활동하다
장사하는 오빠와 울산에서 생활
후배들의 문학활동 지도에 힘써
나중에 오빠 따라 서울서 활동
30여년 지나 발간한 시집에
‘잘있거라 울산만’ 담아
울산 향한 그리움 표현

해방 후 울산에는 김태근, 김어수, 이상숙 등 개인별로 문학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문단이 이루어진 것은 1965년이다.

이 무렵 울산의 김어수와 김종한이 한국문인협회 울산 지부를 건립하기 위해 힘썼지만 한국문인협회가 지부를 설치하려면 등단 문인이 최소한 3명 이상 있어야 한다는 규정을 정해 놓고 있어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울산에는 김어수와 김종한을 제외하고는 등단 문인이 없었다. 김어수와 김종한이 고민하던 중 울산 출신은 아니지만 학성중학교 교사로 있던 함흥근씨가 등단한 것을 알고 함씨를 찾아가 얘기 해 간신히 3명을 갖추어 중앙문단에 지부 결성을 통고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함씨가 서울로 전근을 가는 바람에 울산문협은 한동안 지부구성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김종한은 1964년 고교시절 서울신문에 동화 ‘습지’로 당선되어 아동문학가가 되어 있었다.

울산에 이처럼 문협지부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 기성작가로 활동하면서 울산에 문학의 자양분을 뿌렸던 여류 작가가 김지향 시인이다.

1933년 양산에서 태어났던 김 시인이 울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오빠가 50년대 중반 울산에서 옷 가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었던 그가 울산에 올 때는 20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는 서울에서 시집 <병실>을 발간해 기성작가로 활동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병실>은 젊은 시절 결핵과 싸우면서 피를 토하듯 살았던 그의 산고가 들어 있는 시집이다.

그는 울산에 있는 동안 옥교동 유엔 성냥공장 인근에서 살았다. 울산에 머무는 동안 그는 장백춘, 최종두, 주영돈 등 후배들을 사랑하면서 이들의 문학 활동을 지도하고 도왔다. 50년대만 해도 울산에서 가장 큰 문화 행사가 학성공원 백일장이었다. 이들 3명은 모두 학성공원 백일장에서 입선했고 나중에 울산의 중진 문인이 되었다.

울산 가로수 다방에서 시화전을 열었을 때는 그의 시를 좋아했던 많은 울산 예술인들이 축하의 박수를 보내었다. 나중에 김 시인과 로맨스로 염문을 뿌리게 되는 P씨도 이날 시화전에 얼굴을 보였다. P씨는 당시 울산제일 중학교 국어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김 시인의 집에서 멀지 않은 구 주리원 백화점 인근에 살았던 P씨가 김 시인에게 보내는 연서를 전달했던 소년이 김지수(76)씨다.

김씨는 당시 제일중학교 1학년이었다.

“제가 P 선생님 집 가까이서 살았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니 김 시인 마을의 약도를 정확히 그려주면서 편지를 전하고 오라고 해 이후 오랫동안 편지 심부름을 했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제가 심부름을 위해 선생님 집에 갈 때면 ‘복돌이’라는 큰 개가 어찌나 짖는지 마을 전체가 떠들썩했습니다. 당시 선생님이 큰 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 살았던데 반해 김 시인은 집이 작았고 특히 방이 좁아 셋방에 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됩니다.”

둘의 사랑은 P 선생이 문학활동을 위해 서울로 간 후 김 시인 역시 오빠를 따라 서울로 가면서 서울에서도 지속되었다.

김 시인은 서울로 간 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울산을 잊지 못했다. 서울로 간지 30여년이 훨씬 넘어 발간한 그의 19번째 시집 <밤, 별이 혼자 보고 있는>에 담겨 있는 장시(長詩) ‘잘있거라 蔚山灣’에는 울산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그의 서정이 담겨 있다.

나의 안엔 시방/칠흑의 뚝길이 가르마를 탄다.

흘러간 閑日을 /太和江이 감돌고/高齡의 鶴城址는/철따라 무엄한 눈썹을 바꿔달지만/ 밤을 더불고 무궁한 세월을/태풍속의 사하라를 거닐다/이제는 겨우 半圓을 그린 채/나는 늙어 가나 보아.

춘이와 종두와 영돈이/ 발이 닳던 城南洞 골목/오늘은 초연한 輓鍾을 울려라/뱀의 洞窟에 버림을 당하는/처녀의 拷問 색소폰을/주름잡는 바람은 피어/ 長生浦의 비린내를 다시 한 번/보내 다오

(후략)

김 시인은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갑작스럽게 울산을 떠나는 것이 섭섭해 울산생활을 돌이켜보면서 쓴 시지만 정작 발표가 늦어졌다”고 말한다.

이 시는 울산에서 발간된 시집 중 처음으로 특정인의 이름이 거명된 시다. 최종두씨는 김 시인과 인연이 깊다. 김 시인은 서울로 가면서 당시 경주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청마 유치환에게 최씨의 소개장을 써주었다. 최씨는 장춘옥과 함께 경주까지 직접 가 이 소개장을 청마에게 전달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울산에서 최씨가 시화전을 열었을 때는 청마가 직접 울산까지 와 격려했다. 최씨는 시화전을 시계탑 사거리 인근 김태근씨가 운영하고 있던 장미 다방에서 개최했다.

청마는 시화전에 참석한 후 다다미가 넓게 펼쳐져 있던 성남동 월성여관에서 잠을 잔 후 다음날 아침에는 울기등대를 구경한 후 경주로 갔다. 이 때 최씨는 월성여관에서 청마와 함께 잤는데 지금도 대 시인과 함께 잔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새벽에 눈을 뜨니 선생님이 성경을 보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저에게 울기등대로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울기등대에서 선생님은 방어진중학교 앞 바다를 보면서 ‘나도 평생 바다를 보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했는데 이후 얼마 있지 않아 부산으로 간 선생님이 경남여고를 거쳐 바다가 잘 보이는 영도 남여상으로 자리를 옮긴 후 교통사고로 운명했습니다.”

김 시인과 P씨의 사랑은 결혼까지는 가지 못했다. 김 시인은 서울에 머무는 동안 중견 언론인과 결혼했다. 그는 결혼 후에도 울산 문인들이 서울로 가면 그들에게 서울의 유명 시인들을 소개해 주는 등 문학 활동을 도왔다.

김 시인은 최씨가 서울로 갔을 때도 명동으로 데리고 가 박목월, 서정주, 오상순 등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인들을 소개해 주었다.

당시 명동 갈채 다방에는 많은 시인들이 항상 모여 세상 돌아가는 일을 얘기하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최씨가 김 시인의 도움으로 박목월 시인을 처음 소개 받았던 곳도 갈채 다방이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68년에는 박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게 된다.

편지쓰기를 좋아 했던 김 시인은 서울에 머물면서도 최씨에게 편지를 자주 썼다. 심지어 김 시인은 ‘전우신문’에 시를 쓸 때도 당시 군대 생활을 하고 있던 최씨에게 편지로 병영생활에 대해 자세히 묻기도 했다.

1956년 홍익대학을 졸업한 다음해 시 ‘산장에서’를 예술시보에, 그리고 시 ‘별’을 세계일보에 각각 발표함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김 시인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동안 문인 직함도 많이 가졌고 시집도 많이 출간했다.

한국여성문학회 이사,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를 역임했던 그는 문학공부도 꾸준히 해 1975년 단국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후 1989년에는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에도 한국여성문인협회 부회장, 한국크리스찬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한양여자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거쳐 1976년에 제1회 시문학상, 1986년 대한민국문화상, 1991년 자유시인상을 받았다.

저서도 많아 <병실> <막간풍경> <사육제> <검은 야외복> <속의 밀알> <빛과 어둠사이> 등 20여권이 넘는다. 시집 중에는 종교적 색채가 깊은 책도 있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울산에 있을 때는 울산제일교회에 출석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울산을 떠난 지 60여년이 되는 그는 현재 팔순 중반의 나이로 천안에 머물고 있다. 세월은 모든 것을 망각 속으로 묻고 마는 지 필자가 울산의 문학 활동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전혀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젊을 때는 기억력이 좋아 기록 없이도 모든 사물을 기억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메모를 하지 않고는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런 망각 속에서도 시작(詩作)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지난해에도 시를 발표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젊은 시절을 보내었던 울산이 그리워 한번 쯤 울산에 오고 싶다는 노 시인은 “내가 오랫동안 그리워 해온 울산의 모든 것이 지금은 많이 바뀌었겠지만 그래도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울산”이라는 말을 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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