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인간이게 하는 배려와 孝
따뜻하고 행복한 사회의 밑거름
인성교육진흥법에 효를 뺀건 유감

▲ 이기원 전 울산시 기획관리실장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사다리’ 개념을 내놨다. 사다리 꼭대기에 신(神), 다음에 인간, 포유류 등을 지나 맨 아래에 연체동물을 뒀다. 그가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한 이후 여러 학자들도 각자의 이유로 인간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도구 사용, 정치적 행위, 언어 사용 등.

그런데, 최근 미국 에모리대 프란스 드 발 교수는 저서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타 동물들도 생각을 하고, 도구를 사용하며 나름의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을 다양한 실험을 통해 밝혔다.

뉴칼레도니아 까마귀는 좁은 원통형 물병 속 물에 떠 있는 먹이를 먹기 위해 옆에 있는 자갈을 넣어 수위를 높혀 먹이를 낚아챘다. 비슷한 실험을 네 살짜리 아이에게 시켜보니 8%만 성공했다. 1982년에는 다른 책을 통해 침팬지가 뇌물, 타협 같은 정치적 행위를 한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동물은 때로 인간보다 뛰어난 모습도 보인다. 교토대 연구에 따르면 침팬지 아유무는 0.2초만에 1~9까지 무작위로 컴퓨터 스크린에 배치된 숫자 위치를 기억하고 순서대로 가리킬 수 있는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제시된 그런 이유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이성을 가졌으며 사고력을 바탕으로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켜 온 점은 확실히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준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인간이 가장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것으로 ‘도덕성’을 꼽고 싶다. 그 중 두 가지를 들까 한다.

먼저 사람 간의 ‘배려’이다. 인류는 살아 남으려고 무리를 지었고 사회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사람 간에 지속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배려다. 알다시피 배려는 상대방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하며 사람에게 다가서는 첫 번째 예의라 할 수 있고, 배려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 인자 중 하나라는 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제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 배려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모 대학 교육학과 교수는 “건물 출입문을 나갈 때 옛날에는 앞에서 학생이 문을 잡아줬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학생이 없고 내가 문을 잡아주는데, 더 큰 문제는 전에는 문을 잡아주면 감사표시를 하며 문잡이를 대신 잡아 줬는데 이제는 감사인사는 아예 없고 그냥 나가버려 어떤 경우는 한 참 동안 문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현실을 토로했다.

배려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며, 우리 사회에 배려의 바이러스가 널리 널리 퍼져 나갈 때 더욱 따뜻하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부모에 대한 ‘효’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다른 동물들도 인간 못지 않게 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새끼에 대한 보호본능은 인간보다 오히려 더 큰 동물도 있다. 그러나 효성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다. 효는 전통사회에서부터 가족을 결속시키고 사회풍속을 순화시키는데 기여해 왔다. 가정에서 결속과 화목을 가르쳐 자연스럽게 시민적 소양을 키워주며 이런 교육을 받아야 비로소 인간다운 학생과 시민이 된다. 또 부모은혜에 보답하려 하니 사회의 현안이 되고 있는 노인문제도 해결된다.

그러나 최근 병든 노부모를 돌보지 않는 패륜아들이 증가하고 있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아이 학원 한, 두개만 줄이면 부모님께 큰 힘이 되는데 그러지 않는 사람이 많다”며 안타까워 하는 사회복지사를 본 적이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국회의원 14명이 ‘인성교육진흥법’의 핵심가치에서 ‘효’를 빼는 개정안을 제출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좋은 전통가치는 더욱 계승·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인바 결코 개정되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게 되어 있다. 부모님을 자주 찾아 뵙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바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도리인 것이다.

이기원 전 울산시 기획관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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