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꺽감은 ‘거련 앞에서 잘난 척 하지 말라’는 실성의 말이나 여옥 소후의 충고는 모두 자기를 염려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거련을 이기고 싶다는 치기는 더욱 강해졌다.

며칠 뒤 영명사에 태왕과 거련 태자가 납시어 모든 질자들이 강학소 대청마루에 모였다. 꺽감은 태왕의 제왕학 수업을 듣기 위해 백제공주 다해와 같이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거련이 수업을 시작하기 전 태왕에게 물었다.

“아빠, 질문이 하나 있어요.”

“뭣이냐?”

“저기 꺽감도 우리 고구려의 볼모가 맞나요?”

태왕은 거련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분명하게 말했다.

“당연히 볼모가 맞지. 꺽감은 너의 종이자 하인이고 너는 꺽감의 주인이다. 개가 주인과 밥상을 같이 할 수 없는 것처럼 가야인은 고구려인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자 거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거련은 꺽감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라는 걸 태왕을 통해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태왕은 질자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 질자들은 잘 들어라. 우리가 같이 공부는 하지만 꺽감을 비롯해 너희들 모두는 우리 고구려와의 전쟁에 져서 잡혀 온 인질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태자를 깔보거나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된다. 태자는 너희들의 목숨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작은 왕이고 너희들은 볼모다. 알겠는가?”

“예.”

꺽감도 태왕과 태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꺽감은 이 모든 말이 자신만을 향한 태왕의 근엄한 꾸지람이라고 생각했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슬펐다. 가야인은 고구려인이 될 수 없고, 고구려인은 가야인이 될 수 없다.

내가 인자한 어버이로 생각했던 광개토태왕도 결국 일개 탐욕스런 정복군주에 불과하다. 거련도 그 뒤를 이어 같은 길을 걸어갈 것이다.

개와 다름없는 가야의 질자가 태자와 같은 밥상에 밥을 먹으려 들었던 것이 애당초 잘못이었다. 실성의 말대로 태자 앞에서 잘난 척 하지 말고 그저 쥐 죽은 듯이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천만다행인 것이다.

태왕은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따라 꺽감은 태왕의 말이 건성으로 들렸다. 그는 고향에 있는 양아버지, 후누장군과 정견모주의 사당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잘 계실까? 아버지는 나를 대가야의 시조모 정견모주의 사당에 데려가 참배를 시켰지. 정견모주와 천신 이비가가 혼인해 대가야의 태조인 뇌질주일왕과 금관가야의 시조인 뇌질청예왕을 낳으셨다. 돌아가신 회령대왕은 대가야를 다시 일으켜세운 위대한 증흥군주였으나, 그렇다! 바로 광개토태왕의 칼에 참수를 당하신 것이다.’

 

우리말 어원연구
돌다. 【S】doliya(돌리야), turn the wheel. 참고로 돌(石)의 산스크리트어는 똑같이 ‘do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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