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선영 울산대 교수·수학과

수학이 인류 역사 속에 들어온 이래, 세 사람의 여성 수학자를 말하라고 하면 최초의 여성 수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 불꽃 같은 러시아의 소냐 코발레브스키, 그리고 에미 뇌터를 말한다.

히파티아가 수학자 테온의 딸이었던 것처럼, 에미 뇌터도 독일의 저명한 수학자 막스 뇌터의 딸이다. 독일의 수학자들이 “막스 뇌터가 에미 뇌터의 아버지”라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에미 뇌터의 수학적 업적은 뛰어났다.

에미의 학문적 입문은 늦었다.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여성의 대학 입학이 늦게까지 금지된 독일에서 그녀는 에를랑겐-뉘른베르크 대학교의 청강생으로 시작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도 거의 무급으로 일하던 에미의 수학적 재능을 인정한 힐베르트가 그녀를 괴팅겐 대학에 초청한다. 여성의 강의가 허락되지 않은 괴팅겐에서, 힐베르트는 편법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된 강의를 에미에게 맡겼다. 이 후 에미의 괴팅겐 대학의 전임교수 임용도 수월치는 않았는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이들에게 힐베르트가 “대학 평의원회는 목욕탕이 아니다”라고 한 말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괴팅겐에서 그녀는 당시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 등이 몰두했던 일반상대성 이론과 관련된 물리량 보존 문제를 대칭성의 관점으로 해결하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이 논문은 아직도 20세기 물리학의 주요 업적으로 거론되곤 한다. 그 이후 그녀는 현대수학의 흐름에 중요한 기여를 한 ‘환 이론’을 정립하게 되고 그녀의 이름을 딴 ‘뇌터 환’이 탄생한다.

괴팅겐 시절의 동료 수학자였던 헤르만 바일은 그녀가 ‘막 구운 빵처럼 따뜻하게 사람을 대하였다’고 말했다. 에미가 유대인에 대한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온지 2년 후인 1935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 아인쉬타인은 “여성에게 고등교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뛰어난 여성”이라며 추모했다.

세계수학자연맹에서는 4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세계 수학자 대회에서 그를 기리기 위해 ‘ICM 에미 뇌터 강연’을 연다. 결코 쉬운 길이라고 할 수 없었던 길을 가며 사람에 대한 따뜻함을 잃지 않은 그녀에게서 사람이 걸어야 할 또 하나의 길을 본다. 장선영 울산대 교수·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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