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도문 대원그룹 회장

▲ 박도문 대원그룹 회장(왼쪽)이 직원들과 현장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경우기자 woo@ksilbo.co.kr

경주 양남서 7남매 맏이로 태어나
식구 배불리 먹일수 있는 공장운영 꿈꿔

여러가지 사업하며 성공-실패 거듭하다
모래광구 매입, 현대광업 시작 성공거둬
1981년 제조업으로 사업 다각화 본격화

기업가의 책임감으로 환경운동 시작
교육문화재단·아마추어 스포츠도 지원
울산환경역사박물관 건립, 또 하나의 꿈

꿈꾸는 사람만이 인생의 반전을 맛볼 수 있다고 했던가. 7남매에 조부모까지 열한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부친의 힘겨운 삶을 지켜보던 산골 소년의 꿈은 ‘작은 공장 하나 운영하는 것’이었다. 막연했던 그 꿈은 청년기 희망이 됐고, 전국 23개 계열사, 국내 공장 18개 해외공장 5개, 직영 종업원 6000여명을 거느리며 연간 1조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향토 중견기업 그룹의 회장이 됐다. 대원그룹 박도문 회장. ‘逢山開道 遇水架橋(봉산개도 우수가교)’ ‘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는다’는 일념의 결과였다. 그런 그가 일흔 넷의 나이가 무색할만큼 패기넘치는 목소리로 또 하나의 꿈을 얘기한다. 울산환경역사박물관 건립이다. “기업이 환경을 더럽혔으니 기업인이 해결해야 한다”며 울산환경보호협의회를 만들고, 스스로 ‘경영은 생업, 환경보호는 본업’이라 여기며 24년 동안 매진해 온 ‘환경운동가’로서의 목표이기도 하다. 국가산업단지 조성을 전후해 울산환경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모습을 기록, 환경을 무시한 개발이 가져온 참혹한 결과와 되살리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해 사람들이 환경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사업정년은 다됐지만 봉사사업에는 정년이 없다”는 그의 열정이 만들어 낼 또 다른 꿈의 끝이 기다려진다.

-살아온 과정이 궁금하다.

“고향은 경주시 월성군 양남이다. 울산과 가까운 산골이었다. 10리를 걸어 초·중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는 경주로 진학했다. 7남매 맏이였다. 먹고 사는데는 문제없었으나 동생들이 연이어 태어나면서 빠듯했다. 11마지기의 농사로는 감당이 안됐다. 이듬해 농사를 짓기 전에 쌀이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식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공장 사장이 되고 싶었다. 수산분야가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포항 수산전문대학에 진학했다. 꿈과 현실은 달랐다.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구매업무를 하면서 어슴프레하게나마 사업에 눈을 떴고, 4년뒤 박차고 나와 사업에 뛰어들었다. 1968년도였다. 본적을 울산으로 옮긴 뒤 모기장 제작사업을 시작했다. 직원 5~6명 정도의 가내공업수준이었다. 울산과 포항 등지에 판매하며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뒤이어 낙농업의 가능성을 보고 경주 안강에 20만평 규모의 목장을 조성했다. 경험부족으로 78마리의 젖소를 다죽였다. 하루아침에 무일푼이 됐다. 다시 울산으로 눈길을 돌렸다. 1년간의 탐색끝에 부친의 도움을 받아 페인트 대리점을 차렸다. 가게 얻을 돈만 빌린터라 페인트를 구입할 돈이 없어 고물상에서 빈 페인트통을 구입, 물을 넣어 진열해 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공사를 맡으면 외상으로 자재를 공급받은 뒤 공사 후 갚는 식이었다. 정유공장 탱크 페인팅 작업을 하면서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 녹을 벗기는 작업에 규사 90% 이상의 강도센 모래가 사용됐고, 울산 남목 바닷가 모래가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다. 돈을 버는대로 모래 광구 매입에 나섰다. 현대광업의 시작으로, 경북 울진에서 강원도 고성에 이르기까지 24개(1920만평 규모) 광구를 보유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과 미포조선소가 본격건설가동하면서 모래 판매는 급증했고, 성공을 거뒀다.”

-대원그룹의 시작은 어땠나.

“현대광업에서 제조업으로의 변화를 꾀했다. 1981년께다. 지금의 대원S&P인 강관공장을 건립하면서 사업다각화를 본격화했다. 첨단업종으로 충북 오창과학단지에 오피스트롬(패스, 복사기에 들어가는 레이저)에 집중 투자했다. IT, 여권사업(25개 보안기술 필요)에도 뛰어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8개 업체에 불과한 블루오션이었다. 그렇게 하나씩 늘려가다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물론 49년간 어려운 일도 많았다. 경기에 따라 업황이 춤을 추기 때문이다. 5년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게 기업경기다. 불황기 대비가 중요하다. 중견기업이 버티기 위해서는 제품 경쟁력이 우선이다. 특히 기술사업은 어렵다. 좋은 기술을 개발해도 얼마지나지 않아 추격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시설 투자가 요구되고 출혈이 불가피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룹 계열사 중 매년 어려운 회사가 2~3개씩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나마 자원산업이 있었기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환경운동에 열심이다. 공로를 인정받아 석류장을 받았다. 태화강을 살리는데 앞장섰지만 기업인의 환경운동을 곱게만 바라보지는 않았을텐데.

“환경운동해봐야 돈 안된다. 사업과 전혀 관련없다. 경영에만 매진했다면 계열사 몇개는 더 늘렸을 것이다.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했다. 그렇듯 환경운동과 기업경영을 동시에 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계기는 단순했다. 처음 정착할 무렵만해도 울산의 환경은 좋았다. 공해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국가산업단지 지정 후 건립된 공장가동이 본격화된 80년대들어 울산의 환경은 최악 그 자체였다. 태화강은 죽음의 강으로 변했고, 삼산일대는 대기공해때문에 농작물조차 키울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도 두통약 없이는 하루를 지내기 어려웠다. 공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대기공해와 악취공해에 시달리다 보니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울산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국제환경단체 가입을 권유받았고, UN산하 환경단체인 ‘그린훼밀리(당시 그린스카웃)’ 발기인으로 참여, 울산지부를 맡았다. 환경운동의 시작이었다. 3년 정도 활동했지만 캠페인성 위주의 민간환경단체 역할에 한계를 느꼈다. 실질적인 환경개선 활동에 목말랐다. 다행히 검찰이 관심을 보였다. 새로 부임한 울산지청장이 심각한 환경문제를 인식, 검찰과 연계한 환경운동을 권유했다. 부산지검 울산지청 산하 환경보호협의회가 발족됐다. 검찰·울산시, 기업, 민간단체 등 산학관민이 동참하는 환경단체로, 환경담당 검사 동행하에 합동단속까지 나섰다. 오너 처벌없이는 환경개선 투자 못 이끌어낸다는 판단아래 최대 공해업체 두곳의 사장을 구속, 환경에 대한 기업인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사단법인으로 전환, 현재 800여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울산환경보호협의회의 가장 큰 성과가 아니었나 싶다. 또 생태도시로 변모, 살기좋은 울산을 홍보하기 위한 활동도 기억에 남는다. 인물역할을 제공하고, 제작을 지원한 ‘욕망의 불꽃’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울산의 아름다운 환경을 전국에 알렸다.”

-환경운동뿐만아니라 대원교육문화재단 운영과 아마추어 스포츠 지원 등 사회공헌활동에 열심이다.

“어렵게 공부했다.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이 돈이 없어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회사 인근 학생들부터 돕자는 생각이었다. 또 학생도 학생이지만 훌륭한 선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학생, 선생을 지원하고 싶다. 지원액이 늘어날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빠져든 것 같다. 참교육대상은 모든 교육인들이 꼭 받고 싶어 하는 상으로 자리매김했고, 많은 장학생들이 인사와 청첩장을 보내온다. 흐뭇하기 그지 없다. 아마추어 스포츠 지원도 마찬가지다. 해체위기에 놓인 아마추어 여자 농구단을 맡아 8년간 운영했고, 아마추어 볼링단은 5년을 운영했다. 전국체전 울산시 대표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울산의 자존심을 지키기도 했다.” 논설위원

 

▶박도문 회장은

1943년생. 경북 경주 양남 출신으로 대원그룹 회장, 환경보호협의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제7차 세계물포럼 경주시지원위원회 위원장, 환경보호협의회 회장, 환경보호협의회 이사장, 제8·9대 한국골재협회 회장, 울산적십자발전위원회 위원장, 제8·9대 재울대구·경북 향우회장, 대원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고향을 위해 경주지역 향우회를 만드는데도 앞장섰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38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나눔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국민훈장 석류장, 석탑산업훈장, 자랑스러운 신한국인 대통령 표창 등 다양한 수상경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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