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1)

▲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20세기 이후 외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미국과 유럽으로 편중될 수밖에 없다는 옹색한 변명은 우리의 삶이 필연적으로 그들의 영향권 하에 들어있다는 사대주의적 발상에 기인한다. 빌보드 차트에 오른 팝송이나 할리우드 영화, 코카콜라와 햄버거의 일상적 경험으로 우리는 마치 미국인들처럼 살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이 삶의 양식과 가치의 표준인양 생각한다. 그 안에는 마치 19세기의 유럽인들이 그러했듯이 자기 외의 문화는 야만이나 미개쯤으로 여기는 단선적 진화론의 구시대적 발상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우리의 대중적 이해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열대우림의 풍부한 원목, 고무 등 풍부한 천연자원, 무수한 섬들과 다양한 종족, 저개발과 미개한 생활양식 등등 우리의 삶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후진국 중의 하나로 은근히 깔아 보려는 시선이 역력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들의 자원과 값싼 노동과 풍부한 시장이 없이는 오늘날의 삶을 지탱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일찍부터 독자문명 꽃피운 인도네시아
케두평원의 크라톤 보꼬 왕궁 유적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견줄만

고대로 통하는 입구같은 석조문 지나
최상단 무너진 왕궁의 폐허에 서면
상상속 고대문명과 환상적인 조우

옛 자취 간직한 폐허를 굳이 복원해
원형의 신비감 깨버리기 보다는
상상의 여지 남겨두는 게 좋잖을까

우리가 반만년의 역사와 고유한 문화를 자랑하듯이, 그들 또한 반만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선조는 이미 6000년 전 중국 남부지방으로부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태평양과 인도양으로 진출할 만큼 용기와 모험심이 충만한 민족이었다. 우리의 고조선 시기인 기원전 300년 즈음 그들은 인도와 인도차이나 반도, 그리고 중국을 잇는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하였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뱃길의 중심에 자리한 지정학적 이점은 이들에게 지중해의 페니키아나 카르타고와 같은 문명의 교환시장으로서 경제적 부를 축적해 주었을 것이다.

▲ 케두 평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위에 크라톤 보꼬 왕궁 유적이 자리한다. 고대로 통하는 입구같은 석조문을 지나 최상단에 들어서면 허물어진 건물터만 남아있다. 찬란했던 역사가 지워진 폐허는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본격적인 인도네시아 문명의 역사는 700년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중부 자바는 바로 그 문명의 핵심지역이었다. 인도와 중국의 풍부한 고문헌은 이 지역이 800년경 해상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교역항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문명과 문화의 전파라는 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인도의 찬란한 고대문명이 이곳을 관문 삼아 인도차이나로 전파되어 간 것이다.

지정학적 위치만큼 인도네시아의 고대문명은 인도와 가깝다. 인도네시아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인도 연방의 한 국가정도로 인식될 정도로 인도문명권에 포함된다. 그러나 700년경부터 건설된 이들의 문명은 인도문명을 기반으로 이미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 그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의 삼국시대를 중국 문명의 직설적 유입으로 보는 것만큼 위험하다. 21세기 한국인의 비뚤어진 인식을 바로잡아 주려는 듯 그들은 이 케두(Kedu) 평원 위에 위대한 역사의 거대한 기념비를 남겨놓았다. 그것은 1000년 전에도 그러했듯이 21세기에도 인도와 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를 잇는 아시아 문명의 창구로서 그들의 존재의미를 새롭게 인식해야 하는 개연성을 갖는다.

케두 평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위에 크라톤 보꼬(Kraton Boko 혹은 Ratu Boko) 왕궁 유적이 자리한다. 일반적인 패키지 여행상품에는 결코 포함되지 않을 만큼 숨겨진 유적이지만 엄지 두 개로 ‘강추’하리만큼 매력적인 장소이다. 언덕 정도의 산 정상에 자리한 이 유적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비유해도 지나침이 없다. 언덕을 돌아가며 층단으로 설치된 계단마저 아크로폴리스와 유사하다. 언덕길을 돌아 슬며시 사라지는 계단을 오르며, 다음에 펼쳐질 장면에 대한 호기심을 극대화시키는 수법도 사용된다. 궁궐 안에는 정원으로 사용되었을 법한 아름다운 원형 연못이 시녀들의 밝은 웃음소리처럼 남겨져 있다.

정상부에 도달할 즈음 여러 단으로 형성된 축대와 그 중심에 삼문형식을 갖춘 석조 문이 고대로 통하는 신비의 입구처럼 나타난다. 그것은 긴 계단의 중앙부에서 신성한 장소를 감추어 주는 경계이자, 빨려들 것 같은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축대 밑에는 해자와 같은 유구가 발굴되어 있어 이곳이 궁성과 같은 기능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축대나 계단의 돌쌓기에서는 마야나 잉카 유적에서 발견되는 촉 내민 엇 쌓기의 방법도 연출되어 신비감을 더한다. 불행하게도 최상단의 영역에는 허물어진 건물 터 만이 덩그마니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더욱 폐허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무너진 왕궁의 폐허에서 열대 밀림의 광활한 평원을 내려다보며 사라진 고대문명을 반추해 본다. 나비처럼 시간의 터널을 거슬러 들어가 상상 속의 고대문명과 조우한다. 작은 날갯짓 마다 고대왕궁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다시 세워진다. 거기에는 마트람 왕조의 왕들과 공주와 마법사들이 전설을 노래한다. 폐허이기에 가능한 아름다운 상상이다.

우리만큼 폐허를 두고 보지 못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대개 이름 있는 유적들은 어김없이 복원사업이 추진된다. 그러나 원래의 모습을 온전하게 복원해 내기는커녕 원형에 대한 신비감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사례가 허다하다. 황성 옛터는 자취만 남았기에 아름다운 법이다. 굳이 ‘황성 새터’를 만들어 회상의 자유를 박탈할 필요가 있으랴.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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