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약사동 제방유적

▲ 2010년 울산 중구 일대에서 혁신도시공사를 시작할 때 제방의 흔적이 발견돼 현재의 약사 제방유적전시관이 세워졌다. 전시관에 전시된 농기구, 생활유물들(위)과 약사동제방유적전시관 외관과 내부 조감도.

혁신도시 공사중 제방의 흔적 발견
6~7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약사전시관서 8m 제방 단면 볼수있어

삼국시대 농업 관련 치적 기록 많아
치수는 나라의 흥망성쇠 달려있어
제방 만드는데 최첨단 토목기법 투입

중구 반구동 처녀 일컫는 울산큰애기
반구동서 기른 농산물의 질도 좋아
제방 통해 물공급 원활했기 때문인듯

십일년 춘이월 하령 농자정본 식유민천 제주군수 완제방 광벽전야(十一年 春二月 下令 農者政本 食惟民天 諸州郡修 完堤防 廣闢田野)

왕이 영을 내리니 모든 정치의 근본은 농사이며 먹는 것은 백성에 있어 하늘처럼 귀중한 것이니 여러 주와 군은 제방을 쌓고 논과 밭을 널리 개간하라. -삼국사기 일성 이사금 조

▲ 2010년 울산 중구 일대에서 혁신도시공사를 시작할 때 제방의 흔적이 발견돼 현재의 약사 제방유적전시관이 세워졌다. 전시관에 전시된 농기구, 생활유물들(위)과 약사동제방유적전시관 외관과 내부 조감도.

이십일년 시개 벽골지 편장 일천팔백보(二十一年 始開 碧骨池 片長 一千八白步)

벽골 못를 만드니 그 길이가 일천 팔백보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 이사금 조

▲ 전시관에 전시된 농기구, 생활유물들

서기 330년경 만들어졌다고 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로 추정되는 김제 벽골제에 관한 기록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저수지는 중국 안후성에서 기원전 770년경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의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도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김제 벽골제가 최초의 기록이다.

고대국가에 있어서 물을 다스리는 치수에 필요한 수리시설과 관개 등은 왕조의 통치능력과 중앙집권 강화를 위한 중요한 요소였다고 한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고대서에는 왕이 농업과 잠업에 힘썼다고 한다. 각 왕의 치적에 빠짐없이 기록되는 것이 바로 농업에 관한 치적이다. 그 당시는 물이 필수인 농업이 정치의 근본이며 도시의 발달자체가 큰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치수(治水)는 나라의 흥망성쇠와도 큰 관련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물을 가두는 제방 혹은 강의 범람을 막는 제방 등의 수리시설을 삼국시대 이전부터 만들었다고 보여진다.

▲ 전시관에 전시된 농기구, 생활유물들

2010년 울산 중구 일대에서 혁신도시공사를 시작할 때 제방의 흔적이 발견됐다. 지금의 약사 제방유적전시관이 있는 그 즈음이다. 전시관은 2017년 5월 개관했다.

전시관 측에 따르면 약사제방이 위치한 곳은 커다란 골이 있는 곳으로서, 위에서 내려오는 물을 제방을 쌓아 물을 가두어 아래쪽의 논, 밭에 공급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55m 정도의 길이에 옆면의 폭이 25~37m 정도의 원형으로 추정되며 현재 전시관에는 8m 정도의 제방을 단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제방 실물 유적이라 한다.

약사제방은 주변 일대에서 발굴된 그릇 등 유물과 부엽공법의 성질 등을 보아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초기인 6~7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면 커다란 골짜기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 골을 가득 메운 계곡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제방 단면을 자세히 보면 제방을 층층이 쌓은 모습이 거의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데 제방의 아래쪽은 실트류의 점토를 깔아 물이 새는 것을 막고 상단에 패각층, 즉 조개 껍질류를 깔아 물 빠짐이 잘 되게 하며 나뭇가지와 잎을 흙과 함께 이어 쌓은 부엽공법을 썼다.

젖은 나뭇잎은 밀착력이 커지는 성질을 이용해 흙과 단단히 고정되도록 하는 부엽공법 위에 삼국시대 무덤축조 방법처럼 다른 성질의 흙을 돌려가며 쌓아 물의 힘을 견딜 수 있도록 성토해 완성했다고 한다. 하나의 건축에 당시로서는 최첨단 토목기법의 기술적 역량이 투입된 것이다. 그렇게 축조한 제방으로 인해 농사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국가 전반의 기술발전도 가져 왔을 것이다.

향토연구에 따르면 울산 중구를 알리는 캐릭터 ‘울산 큰 애기’는 중구 반구동 일대의 처녀들을 말한다고 한다. 반구동 처녀들은 인물이 좋고 서울의 농수산물 시장에서도 반구동 일대의 배추나 농산물이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는 예로부터 동천 등과 함께 제방이 존재할 당시부터 약사 제방을 통해 물 공급이 원활했기 때문에 땅이 기름져 채소와 과일이 잘 되고 영양상태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나라의 중요자산이었던 제방은 그 축조가 중요한만큼 공사한 후에 그 기록물을 남겼다. 통일신라 때 세운 영천 청제의 보수와 진지왕 때 세운 수리시설과 관련된 대구 무술 오작비(戊戌 嗚作碑)와 같은 것이다. 정확하게 해석이 되진 않지만 보를 쌓고 농지를 개발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비석들의 탁본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 살펴봄 직 하다.

▲ 박혜정 울산시 문화관광해설사

또 울산에도 조선시대 중심이었던 동헌 뒷마당에 울산을 다녀간 군수, 부사의 선정비중 부사 이헌주와 행군수 운영한의 비에도 제방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수령의 치적에도 빠지지 않는 중요한 임무였던 셈이다. 약사제방은 조선후기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울산의 제방은 여지도서(1765)에 33곳, 학성지(1749)에 32곳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

청명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이나 새벽안개가 낀 연못의 전경을 보며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이라는 글귀를 많이 떠 올린다.

현명한 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의미인데, 흐르는 물처럼 순리대로 사는 삶을 말하기도 한다. 더불어 물은 잘 다스릴 경우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로서 그 것이 현명함 중의 으뜸이라는 의미도 포함된 것 같다.

박혜정 울산시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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