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아침에 현관에서 인사하는 아내를 뒤돌아보지도 않고 뛰어나갔다. 마치 반항하는 청소년처럼. 신발도 구겨 신고 계단을 세 칸씩 내디뎠다. 택시를 잡으면서 후회가 밀려왔다.

‘밀린 일이 쌓여 있고 출근 시간은 늦었지만 이렇게까지 허둥댈 일은 아닌데. 뒤돌아서 밝게 인사하는 게 몇 초가 걸린다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는가. 게다가 계단에서 넘어지면 어쩌려고. 나는 왜 이런 간단한 일도 판단을 못했던 것일까?’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는 집중력, 판단력, 심지어 IQ도 떨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프린스턴대학 심리학과 엘다 샤퍼 교수는 결핍의 영향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시간이든, 돈이든, 우정이든 부족해지면 ‘정신의 대역폭(mental bandwidth)’이 좁아지고 결핍에 따른 특징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광대역 통신에서 대역폭은 전달하는 정보의 양과 속도를 결정한다. 정신의 정보처리능력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시간에 쫓기거나 빈곤이 심하면 자신과 주위를 돌볼 여력이 없어진다. 일에 쫓기는 사람은 계속 일에 치이고, 빚에 쪼들리는 사람은 무리한 대출로 빚을 키운다. 결핍이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만들고 다시 결핍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무언가에 항상 쫓기는 사람은
정신의 대역폭이 점차 좁아져
결핍상황을 자꾸만 악화시킨다

현대인들은 멀쩡한 겉에 비해
대부분 속은 걱정으로 문드러져
목표에 매달려 주변은 보지 못해

감당할 수 없는 욕심은 내려놓고
때로는 효율성의 터널서 벗어나
즐기듯 일하며 정신의 재충전을

인도의 사탕수수 농부는 예전 우리나라의 춘궁기처럼 빈곤에 시달리다가 수확 직후에 빈곤에서 벗어난다. 수확 전후에 이들의 인지기능을 측정해보니 수확 전에는 IQ가 13~14 정도 낮았다. 밤을 꼬박 새우게 하고 검사를 하면 이 정도 차이가 난다. 심한 빈곤 상태에서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당장 맞닥뜨린 문제를 헤쳐 나가는데 많은 정신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선천적 능력이 비슷하더라도 아프리카 개발도상국과 북유럽 선진국 중 어디에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발휘하는 능력도 삶도 크게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면 부유할수록 지능이 높은가. 그렇지 않다. 절대적 빈곤이 아니면 결핍은 상대적이다. 현대에는 오히려 부유하면서 결핍된 경우가 많다.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누구는 생계를 위해서, 누구는 부와 권력을 더 갖기 위해 일을 벌이니 시간이 부족하다. 현대 문명은 과거에 없던 풍요를 가져왔지만 시간 여유는 따라 오지 않았다.

다시 나의 출근시간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뒤도 안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모습만 보면 아프리카 초원의 어떤 장면을 연상시킨다. 사자에 쫓기는 얼룩말이다. 얼룩말은 평온하게 풀을 뜯다가 사자가 쫓아오면 죽을힘을 다해 달린다. 이때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근육 활동에 집중한다. 평소보다 몇 배의 공기를 흡입하고 심장 박동은 최대로 뛰며 산소와 당분이 풍부한 혈액을 미친 듯이 다리 근육에 공급한다.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도 최고조에 이른다. 소화기능은 멈추고, 정신의 대역폭은 한껏 좁아져서 관심은 오직 생존 뿐 통증도 못 느낀다.

스탠퍼드 대학 생물학과 로버트 새폴스키 교수는 아프리카에서 30여년간 동물들을 관찰하고 스트레스가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연구하였다. 현대인은 안전한 도시에서 음식 걱정 없이 지내는 것 같지만, 실은 얼룩말이 하루 종일 도망 다니는 상태에 비유된다. 멀쩡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온갖 걱정으로 타들어간다. 아침 출근부터 전쟁 모드로 바뀌어서 하루 종일 주어진 일과 상사 눈치에 시달린다. 귀가한 뒤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만성적으로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은 근육운동에 쓰이지 못하고 혈압과 혈당만 높인다.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데 급급하니 정신의 대역폭도 장시간 좁아져서 마치 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다. 시야는 좁아지고 오직 목표 지점, 즉 결과에만 관심이 있다. 주위는 전혀 보이지 않아서 도달하는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

다행히 정신의 대역폭은 환경에 따라서 변하므로 개선의 여지가 있다. 우선 자신의 목표가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돌아본다. 남이 하니까 부러워서 겉멋으로 하는 것은 아닌지, 감당할 수 없는 욕심을 부렸는지 살핀다. 스마트폰 성능 향상을 위해 불필요한 앱을 삭제하듯이 목표 과제를 줄인다. 다음으로는 여유 시간을 확보한다. 휴식이 단지 게으름일 뿐이라 여긴다면 정신의 재충전은 기대할 수 없다. 때로는 효율성의 터널 바깥으로 나와서 즐기듯 일하는 것도 괜찮다. 물론 말처럼 쉬운지는 모르지만.

가을 오후 진료실에 들어선 환자가 반갑게 인사한다. “병원 앞 벚나무가 단풍이 곱게 들었네요. 오늘은 날씨도 서늘해서 명덕호수 한 바퀴 걷고 왔어요.” 하루 종일 앞만 보고 바쁘게 지내온 나에게 환자가 계절의 변화를 일깨워준다. 치유 받는 느낌이다.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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