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15)학성공원 백일장

▲ 1974년 온산재건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데리고 학성공원 백일장에 참석했던 엄원대 선생(뒷줄 왼쪽 첫번째)이 이 대회에 참석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입상자, 부산일보·국제신문에 보도
신문 통해 울산 전체에 알려져
학성공원 백일장 장원 출신에
권정식 제독·최종두 시인·양명학 교수
1974년 재건학교 여중생이 장원해 화제

울산은 해방과 함께 김태근·김어수·이상숙·박상지가 중심이 되어 문학 활동을 이끌어갔다. 시기적으로 이들이 활동할 때 보다 조금 늦게 개최가 되었지만 울산 문학의 꿈나무들을 키웠던 학성공원 백일장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학성공원 백일장은 울산의 초중고등학생들을 상대로 미술과 문학의 꿈을 키워주기 위해 열렸지만 언제부터 개최가 되었는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문학의 경우 50년대 중반 이미 이 대회에 참여해 수상한 사람들이 밝혀지면서 학성공원 백일장이 처음 개최된 시기를 6·25 무렵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 대회는 교육주간을 맞아 울산군 교육청이 주관했다. 울산광역시 교육청은 2001년 130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울산교육사>를 발간했지만 울산청소년들의 서정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학성공원 백일장에 대한 얘기는 한 페이지도 없다.

문학의 경우 형식은 운문과 산문으로 나누어졌고 시제는 군 교육청에서 시합 당일 발표했고 때로는 시제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학생들이 응모하기도 했다.

장원을 한 학생은 당시로서는 학생 개인이 갖기가 쉽지 않았던 국어사전을 그리고 입상자들은 노트와 연필을 받았다.

입상자들의 이름은 신문을 통해 울산 전체에 알려졌고 그날부터 문학도의 대우를 받았다. 당시 부산일보와 국제신문은 매년 이 대회를 취재해 입상자들을 보도했다.

이 대회가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였나 하는 것은 울산농고 출신으로 이 대회에서 장원을 한 권정식 제독의 글에서 알 수 있다. 권 제독은 울산농고 16회 출신으로 고교 2학년 때인 1956년 이 대회에 출전해 장원을 했다. 그는 울산농고를 거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구축함 함장, 한미 연합사령부 인사부장, 제3해역사령관, 해군교육사령관을 거쳐 1993년 소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최근 발간한 자서전 <바람과 구름속에 추억을 묻어놓고>에서 ‘고교 2학년 가을 한글날 도산공원(학성공원)에서 전국 학생 시 백일장이 열렸다. 친구들과 함께 공원에 도착해 보니 공원이 학생들로 만원인데 그중에서도 여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우선 낯선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아침 조례 시간에 시상대가 준비되고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장원이었다. 또 한 번 나는 용기를 얻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시상식 며칠 후 학교에서 분홍색 봉투의 편지를 한통 받았다. 입상한 여학생이 장원한 나를 중심으로 시작(詩作)활동을 위한 모임을 갖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졸업반이 되면서 사관학교 진학을 위해 모든 일에 손을 떼고 오직 학업에만 전념했다.’

권 제독은 해군사관학교 진학을 위해 문학 활동을 포기했지만 이때가 가장 꿈이 많았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이 때 편지를 보낸 여학생이 문학소녀로 활동했던 장벽춘이다. 장씨는 당시 울산여고 2년생으로 이해 ‘가을’이라는 시제로 입선했다. 성격이 활달했던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테니스를 쳤던 여학생이다. 그는 울산초등학교 앞에 살았는데 5·16혁명 후 박정희 대통령의 부관이 되는 손영길 장군 역시 울산초등학교 인근에 살아 그와 울산초등학교에서 테니스를 쳐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고교 졸업 후 성안 출신의 이재수 중위와 결혼했는데 이씨는 5·16 후 육군대위 계급장으로 울산군수를 지내다가 나중에 장군이 되었다. 장씨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내가 울산여고를 다닐 때만 해도 울산에서는 김지향 선생과 박상지(박재희) 선생이 유명 문인이었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수학을 가르쳤던 강석구 선생이 웅변과 함께 문학을 잘 가르쳐 인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또 “한번은 가로수 다방에서 시화전이 열려 그곳에 갔더니 유치환 경주고등학교 교장이 내게 좋아하는 시를 한편 외워보라고 해 김소월의 ‘진달래’를 낭독해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까지 있다”고 회상했다.

그는 현재 서울 구로동에 살고 있고, 남편 이 장군은 올 봄 타계했다. 그는 권 제독에 대해 “권 제독은 고교시절 재능 있는 문학도였는데 사관학교 진학을 위해 문학을 포기했다”면서 “나중에 남편과 권 제독이 장군이 된 후 서로 자주 만났기 때문에 이 때 고교 시절 문학 얘기를 권 제독과 자주 나누곤 했다”고 말한다.

당시 울산여고에서 장씨와 함께 문명(文名)을 날렸던 시인으로 이난영씨가 있다. 그 역시 이 대회에서 여러 번 입상한 후 문학도의 꿈을 키우기 위해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를 지원 합격했지만 가정 경제가 어려워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학성공원 백일장에서 가장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 권 제독의 울산농고 두 해 후배 최종두 시인이다. 울산제일중과 울산농고시절 탁구 선수로 명성이 높았던 그는 문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이 대회에서 ‘빨래’와 ‘들국화’로 장원을 두 번이나 했다. 최 시인이 고교생일 때만 해도 울산농고에 문학반이 따로 없었지만 황오윤 교장의 지원 아래 지원우 국어선생이 평소 문학에 취미가 있는 학생들을 상대로 집중적으로 글공부를 시켜 학성공원 백일장에서 해마다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59년 대회 시제는 ‘바위’였다. 이 해 백일장에 참여한 학생들은 백일장이 열리기 전 사라호 태풍이 울산 전역을 휩쓸고 가 피해가 심했기 때문에 시제가 ‘태풍’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했지만 예상외로 ‘바위’가 시제가 되었다. 심사는 김태근·김어수 선생이 했다. 김태근은 당시 ‘울산문우회’를 조직하고 향토지 <태화강>을 발간하는 등 울산문학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김어수는 나중에 한국문학회 울산지부가 결성될 때 함흥근·김종완과 함께 참여한 후 울산문협 지부장을 역임했다.

이 대회에서는 특이하게도 언양농고 출신 이종대가 장원을 하고 2등은 울산농고 한석근이 차지했다. 한씨는 이에 앞서 1958년 대회에서도 ‘연석촌’으로 응모해 3등을 했고 나중에는 <학원>에도 작품이 발표되기도 했다. 이종대는 언양농고 졸업 후 서울대학으로 진학했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로 있던 그는 1975년 동아일보 광고사태 때 ‘동아투위’로 활동하다 해직된 후 경제인으로 변신, 외국인 회사에서 근무를 오랫동안 했다.

양명학 전 울산대 교수는 울산농고 19회로 특이하게도 산문으로 장원을 했다.

1974년에는 중등부문에서 온산재건학교 엄모 여학생이 장원해 울산학생들을 놀라게 했다. 재건학교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중등이상의 교육을 시키기에는 아직도 빈곤했던 농어촌 학생들을 위해 만든 학교다. 울산 역시 공업도시가 된 후 새마을사업이 일어나면서 농어촌이 크게 변화했지만 아직 중학교가 없어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로 진학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당시 온산 역시 마찬가지로 중학교라고는 달랑 하나밖에 없어 초등학교 졸업 후 진학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무렵 당월리에서 사진관을 경영했던 김석주가 당월초등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 청소년들을 가르친 것이 온산재건학교의 시작이다. 설립당시 교사로는 김윤태, 임명자, 엄원대, 엄주성, 문재덕, 허정선이 있었다. 이들 중 엄주성과 허정선은 타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재건학교 학생들을 가르쳤다. 엄양이 장원의 영광을 누린 것은 당시 군인으로 국어를 가르쳤던 엄원대 선생의 노력이 컸다. 엄 선생은 원광대학교 국문과 재학 중 입대했는데 온산파출소 공익요원으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온산재건학교가 온산파출소 가까이 있어 파출소 근무가 끝난 후 밤마다 재건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그는 수업을 하는 동안 엄양을 비롯한 학생들이 중학교 진학은 못했지만 문학에 재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재질 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문학을 공부시켜 학성공원 백일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졸업 후 포항으로 시집을 갔던 엄양은 이후에도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개최하는 백일장에 응모해 수상을 여러 번 했는데 지금은 부산에서 살고 있다.

엄 선생은 대학 졸업 후 문학박사가 되었다. 이후 국사편찬위원으로 일했던 그는 양산대학 교수를 지내다가 2002년 <온산읍지>를 발간할 때는 감수를 맡는 등 온산지역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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