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이사품왕과 목라근자는 신라의 남거성 전투와 금성 전투에서 절반의 병력을 잃고 가야와 왜, 백제에서 구원군을 기다리며 종발성에서 농성하고 있었다.

가야는 으늑한 변방 구석의 지방 군현이 아니었다. AD42년에 김수로왕이 낙동강 젖줄기의 구지봉에서 금관가야를 건국한 이래로 철을 중심으로 강력한 부족국가를 세웠고 이후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일취월장한 400년 된 강력한 주권국가였다. 가야의 외교력은 백제 일본 산동뿐만 아니라 요동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의 후연까지 미친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다.

금관가야의 영토는 낙동 이동에 독로국과 미리미동국 2국, 낙동이서에 접도국, 고자미동국, 고순시국, 반로국, 낙노국, 미오야마국, 감로국, 주조마국, 안야국, 그리고 소백산맥 너머 옛마한 땅에 설치한 가야 6국은 상기문, 하기문,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에 이르렀다. 동서 오백 리와 남북 오백 리의 넓은 국토와 탄탄한 국가체제, 그리고 3만의 철기군을 가진 나라였고, 능란한 외교정책과 전략에 의해 독자적인 대외활동을 펴나간 나라였다.

금관가야의 이사품왕이 신라의 내물 마립간을 친 배후에는 백제 아신왕의 부추김도 있었지만 이러한 국력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라근자가 백제 아신왕의 새로운 전갈을 가져와 이사품왕에게 말했다.

“마마, 백제의 아신왕이 팔랑치를 넘어 대가야의 고상지를 쳤다고 하오.”

“오, 이제 후연의 모용성에 이어 아신왕마저 움직였군.”

“그렇습니다. 바야흐로 이번 전쟁은 한반도 전체에 전쟁이 벌어지는 국제전이 되었습니다.”

목라근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가야는 왜의 용병을 끌어들여 3만으로 신라 금성을 치고 이에 고구려는 평양에서 5만의 보기군을 남진시켜 신라와 임나왜소 종발성까지 남하했다. 후연의 모용성은 광개토태왕이 고구려를 비운 틈을 타 고구려로 쳐들어가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기회를 엿보던 백제는 동진하여 대가야의 고상지를 쳤으니 그야말로 한반도는 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 왜와 후연, 여섯 개의 나라가 얽혀 싸우는 거대한 전쟁터로 바뀐 것이다. 너구리같은 이사품왕이 흡족해하며 말했다.

“고구려군은 이번 원정으로 나라가 없어질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열흘만 버텨주면 후연은 국내성을 쳐들어가 고구려를 집어삼키고 백제는 대가야를 먹고, 우리는 다시 신라를 먹게 되면 고구려는 한반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후연의 모용성과 백제의 아신왕이 조금만 더 일찍 움직여 줬더라면 나는 신라 금성에 그대로 죽치고 있어도 될 텐데….”

이사품왕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고구려군의 남진에 신라 반월성에서 부랴부랴 도망 오느라 미처 챙겨오지 못한 전리품과 보반왕비와 궁녀들의 자색이 눈앞에 삼삼했다.

그때 조용하게 농성하고 있던 종발성 남문 쪽에서 갑자기 큰 소란이 일어났다.

 

우리말 어원연구
가야. 오늘날 이름과 지명이 어디인지는 모두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추정된 지역을 소개하면 금관가야(김해), 독로국(동래), 미리미동국(밀양), 접도국(칠산), 고자미동국(고성), 고순시국(진주), 반로국(고령, 대가야), 낙노국(하동 악양), 미오야마국(합천 묘산), 감로국(김천 감문), 주조마국(김천 조마), 안야국(함안), 상기문(임실, 번암), 하기문(남원), 상다리(순천, 광양), 하다리(여수, 돌산), 사타(고흥), 모루(무안)로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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