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취역 후 48년간 태평양서 ‘맹활약,’ 2008년 퇴역

▲ 미 해군의 마지막 재래식 항공모함 키티호크.

한국과도 친숙, 인종갈등으로 흑인 수병들 ‘함상 반란’ 주역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에 취역한 후 48년 동안 태평양 해역을 누빈 미국 해군의 마지막 재래식(비핵추진) 항공모함 ‘키티호크’(CVN-63)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USA투데이 등 미언론에 따르면 미 해군은 2009년 5월 퇴역시킨 키티호크 함을 해체하기로 했다.

애초 해군은 퇴역 후 서부 워싱턴주 퓨젯사운드항에 정박해 있는 키티호크를 수리 후 재취역할 계획을 추진했으나, 논의 끝에 해체 결론을 내렸다.

키티호크 급 항모 4척 가운데 1번 함으로 마지막까지 활동한 키티호크는 만재배수량 8만 3000t에 전투기와 헬기 등 85대의 함재기와 5624명의 승조원을 태우고 베트남전과 걸프전 등 현대사에 변곡점이 된 중요 전쟁에는 모두 참가한 ‘베테랑’이다.

미군의 개입으로 베트남전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1965년부터 미군이 철수한 1972년 말까지 키티호크는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 임무 등을 수행했다.

키티호크가 일반에 알려진 가장 큰 계기는 1972년 10월 12일에 발생한 ‘함상 반란’이었다.

당시 필리핀 수빅 만에 정박해 있던 키티호크 탑승 흑인 승조원들이 인종차별에 항의하면서 백인 동료들과 벌인 주먹 싸움이 다음 날까지 이어지면서 46명이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이 바람에 작전 수행이 12시간가량 중단됐다.

그러나 해군 지휘부는 이 사건 직후 주먹 싸움에 가담한 흑인 26명만 군법회의에 회부하는 등 편파성을 여실히 보였다.

이 사건 이후 다른 함정으로까지 흑백갈등이 퍼져나가자 당시 해군 참모총장이던 엘로 줌월트 대장은 해군 복무규정을 개정, 인사와 근무 등에서 인종차별을 최소화하기에 이르렀다.

군내에 만연하던 흑백 인종차별 폐지에 분수령이 된 것이 키티호크인 셈이다.

키티호크는 1979년부터 본격화한 베트남인들의 집단 해상 탈출 지원활동에도 큰 역할을 했다.

쪽배에 의지한 채 망망대해로 나선 베트남인들(‘보트피플’)을 발견, 구조해 안전지대로 후송하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한국과의 인연도 만만찮다.

같은 해(1979년) 10월 26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키티호크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비, 한국 근해에 긴급 전개돼 군사력을 과시했다.

이후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 요코스카(橫須賀)를 모항으로 하는 7함대에 전진 배치된 키티호크는 한국 해군과 수시로 연합훈련을 하는 등 존재감을 여실히 발휘했다.

키티호크는 또 이라크 침공작전 등에서도 활약했다.

미 해군은 2005년 니미츠급 핵 추진 항모 조지 워싱턴(CVN-73)이 대체함으로 선정됨에 따라 2008년부터 키티호크를 퇴역하기로 발표했다.

이에 따라 키티호크는 2008년 5월 28일 요코스카를 떠나 퓨젯사운드항으로 옮겼다.

미언론은 키티호크에 대한 해체 결정에도 아직 해체 시기와 장소 등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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