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바퀴 돌다 튀어 오를 곡선이다 불편한 도형을 만들어 내게 번진다 난 뼈마다 불이 타올라 벌레들 하직하듯 불안을 빨아먹는다 손으로 빛을 가리며 내려가던 길을 다시 오른다 사방을 횡단하며 방향과 크기를 바꾸며 그렇게 어둠의 깊이를 잴 수 없다 당신만큼 다른 색감의 근육으로 풀어진다

침묵으로 기억되는 사방은 위독할 뿐, 즉흥적 농현이 그리운 밤 당신이 파고들어 웅크렸던 가슴 마침내 열리고 먼동 정수리에서부터 뜨겁다 목차 없이 써 내려가는 본문처럼 전신으로 번진다 그래 이제 그 빛 당신 밖에 있다 난로 속 묵은 장작 주황으로 불타듯 검은 몸속에 눈부심이 있어, 당신의 무수한 뿌리와 줄기가 덩굴처럼 내 몸을 휘감는다
 

▲ 엄계옥 시인

나쁜 기억은 몸이 현대로 올수록 정신을 과거로 되돌린다. 끌어안고 살아서다. 남자의 무의식에 여성 아니마가 사는 것처럼 여자의 마음속에는 남성 아니무스가 산다. 여자 안에 사는 아니무스가 상처를 입었을 때,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믿지 못한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자리할 뿐이다. 이 시는 여성 안에 사는 두 아니무스에 대한 이야기다. 첫 번째 연의 아니무스는 어린 날 상처를 준 남성이다. 오랜 세월 화자를 불안에 떨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깊이를 잴 수 없는 불안을 준 남자를 두 번째 연의 착한 아니무스가 와서 물리친다. 검은 몸속의 눈부심으로 사방이 위독해도 따뜻하게 감싼다. 그로인해 마음을 지배하던 나쁜 남자에 대한 기억이 사랑으로 변환 된다. 비로소 깊은 상처에서 걸어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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