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광개토태왕은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절영도 남쪽 석대에 설치했다. 태왕이 절영도 남단을 사국일통을 기념하는 제단으로 잡은 것은 첫째 고구려 국내성에서 볼 때 가장 먼 한반도의 최남단으로 한반도를 일통한 끝자락이고 둘째 사국 일통을 끝까지 방해한 왜를 쫓아낸 곳에다 멀리 왜 땅이 보이기 때문이다.

태왕은 삼족오 깃발을 높이 세우고 제물을 올리고 향을 피운 뒤 국조 단군과 시조 주몽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어 연개남 장군이 사국일통의 험난한 과정을 보고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은택은 위로는 황천에 미치고, 그 위무는 북으로는 숙신부터 남으로 삼한까지, 서로는 거란부터 동으로는 예맥까지 사해에 떨칩니다. 특히 오늘은 한반도의 삼국의 마지막 일한인 가야를 정벌하고 왜를 물리쳐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사국을 모두 하나의 통치, 하나의 핏줄, 하나의 언어로 일통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천지신명이시여, 국조 단군왕검과 시조 동명성왕이시여, 폐하와 이 나를 굽어 살피사 함부로 외국의 오랑캐들이 한반도를 침공하거나 능멸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고 배달민족이 홍익인간의 깃발 아래 대대손손 국태민안과 생생복락을 누리게 하소서.”

사국일통의 의례가 끝나자 광개토태왕은 신궁의 시위를 한껏 당겼다. 그는 바다 건너 왜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이 화살은 배달민족이 왜를 향해 날리는 정의의 화살이다. 다시 한 번 왜가 우리 땅을 침범하면 내가 직접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왜왕을 사로잡고 왜 땅 전체를 고구려의 발 밑에 굴복시킬 것이다.”

사한의 사람들은 이날 광개토태왕이 대를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일본을 향해 화살을 쏜 곳을 태종대라고 불렀다.

태왕은 임나왜소이자 금관가야의 최후의 보루인 종발성을 안라국의 수병으로 지키게 하고, 신라 금성은 내물마립간과 계림장군에게 맡겼다. 승냥이 같은 모용성이 광개토왕이 비운 고구려로 쳐 들어가 요동의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켰기 때문에 태왕의 마음은 바빴다. 태왕이 금성에서 5만의 보기병을 이끌고 고구려 국내성을 향해 다시 질풍노도처럼 올라가려고 하던 때에 대가야에서 온 박지 집사가 태왕에게 급히 보고했다.

“백제의 아신왕이 대가야를 쳐들어왔나이다. 이에 우리가 결사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고상지 도독은 전사하고 어라성은 아신왕에게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고상지 도독이 전사했다고?”

“예, 고장군은 아신왕의 심복 진무 장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박지 집사는 지금 어라성은 피의 약탈이 이뤄지고 있으며 자신만 겨우 목숨을 건져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

 

우리말 어원연구

태종대. 현재 영도 남단에 있는 바위절벽. 태종 무열왕이 활을 쏜 사후지라서 태종대라고 불린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나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태종대를 사후지로 했다거나 영도나 동래 일대에 다녀간 역사적 기록은 전혀 없다. 태왕, 태종으로 불리기도 했던 광개토태왕이 영도와 가까운 종발성을 쳐 한반도에서 왜병을 물리친 뒤 영도 남단 바위절벽에서 사국통일의 제천행사를 하고 일본을 향해 활을 쏘았다는 게 태종대 스토리로 더 잘 어울린다.

안라. 현재의 함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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