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16)울산일요화가회와 노용택

▲ 울산일요화가회에서 회장을 두 번이나 지냈던 노용택 화백은 울산미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울산일요화가회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5년 서울서 창립된 일요화가회
김종필 전 중정부장 참여해 유명세
울산일요화가회는 1972년 4월 창립
3·5대 회장 지낸 노용택 화백 추진
1993년 전국대회 350여명 참가 성료

울산미술협회가 그동안 울산의 수준 높은 화가들을 배출했다면 울산일요화가회는 울산미술인들의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울산미술사는 1993년 발간된 <울산예총 20년사>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발간된 지도 이미 사반세기가 되어 초기 울산미술의 발전을 위해 힘썼던 천재동, 최희 선생이 타계하는 등 울산미술계에도 변화가 많았다.

천재동 선생은 울산미술계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그는 나중에 부산으로 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속학자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태화초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부터 미술에 관심을 갖고 학생들에게 그림 공부를 가르쳤던 그는 50년대 이미 울산에서 열리는 시화전 삽화를 그렸다.

해방 후 울산에서 처음 시화전이 열렸던 때는 1954년 12월이었다. 옥교동 조양백화점 내 내고향다방에서 열린 시화전에는 김태근(고도의 아침), 박상지(문), 정해상(처녀송), 이용우(패각의 소원), 박숙경(고운 저별) 등 울산을 대표하는 시인들이 작품을 전시했는데 이 때 이미 천씨는 이들 시에 삽화를 그렸다.

최희 선생은 1957년 울산제일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활동하기 전 부산 혜화여고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울산에 온 그는 현 중구청 인근에 요즘의 미술학원으로 볼 수 있는 ‘최희화숙’을 운영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울산일요화가회 출발은 울산미술협회지부 창립보다 조금 빠르다. 울산일요화가회는 1971년 12월 창립총회를 위한 모임을 갖고 1972년 4월 출범했다. 울산미술협회지부는 이보다 조금 늦은 1972년 9월에 창립되었다.

전국 조직인 일요화가회는 1965년 서울에서 처음 창립되었다. 일요화가회는 명칭이 말해 주듯 일요일에 모여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출발했다. 이 단체가 유명해 진 것은 창립 다음해인 1966년 김종필이 회원이 되면서다. 5·16혁명의 주역으로 박 정권 초기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는 등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김종필은 이 무렵 공화당 창당을 놓고 반대 세력에 밀려 정치 하한기를 맞고 있었다.

정치를 하기 전 그림에 취미가 있었던 김종필은 이 때 그림을 그리면서 소일했다. 이후 김종필은 지방에서 일요화가회가 창립될 때마다 참석하고 회원들이 단체전이나 개인전을 열면 축전을 보내었다.

울산일요화가회는 이수원, 박흥대, 박동훈, 장승제가 중심이 되었다. 이수원과 박흥대는 당시 미술교사였고 박동훈과 장승제는 방송인이었다. 이들 중 이수원은 일찍부터 화가로 활동 해 1954년 12월 내고향다방에서 시화전이 열렸을 때 이상숙(임바램, 작부), 박숙경(고독), 박태윤(비분의 밤)시에 삽화를 그렸다.

울산일요화가회는 창립총회를 작천정에서 개최하고 회장으로는 박동훈을 뽑았다. 이 날 모임에는 박씨 외에도 임청평, 이수원, 김홍명, 유복순, 최성희, 이명숙, 김계영이 참석했다. 조금 후 신정동에서 윤 화랑을 운영하고 있던 윤명희도 참여했다.

울산일요화가회는 울산이 공업단지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일반시민과 근로자들에게 취미생활의 시간을 주고 특히 지역민들과 타지에서 온 사람들의 간극을 좁힌다는 생각으로 출범했다.

일요화가회 회원들이 처음 전시회를 가진 것이 1972년 9월이었다. 장소는 시계탑 사거리 인근의 미도다방이었다. 이때만 해도 울산은 문화공간이 없어 시화전과 시낭송회가 주로 다방에서 개최되었다.

울산일요화가회 3대와 5대 회장을 지내면서 이 단체의 전성기를 가져왔던 지암(志岩) 노용택(盧龍澤) 화백이 회원이 된 것이 이 무렵이다. 1931년 온산면 대안마을에서 출생했던 노 화백이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하게 된 것은 고교 졸업 후 교사로 활동하면서다.

부산에서 경남상고를 졸업했던 그는 고등학교 때만 해도 미술보다는 체육에 흥미를 가져 운동을 좋아했다. 당시 경남상고에는 양달식이라는 유명한 미술선생이 있었는데 양 선생은 노 화백이 그림에 재질이 있다는 것을 일찍 발견하고 그림 공부를 권유했지만 그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고교를 졸업할 무렵 국내 포스터 대회에 입상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미술선생이 될 줄은 몰랐다. 고교 졸업 후 울산으로 와 온양·용남·복산·병영·대현초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던 그는 특활 시간이면 미술선생으로 뽑혀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는 미술선생을 따로 둘 처지가 못 돼 교사들 중 그림에 재질 있는 선생을 뽑아 특활 시간에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게 했다.

이러다보니 그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문이 울산에 퍼지게 되었다. 1972년부터는 학교에서 나와 금융계로 옮겼다. 금융계에서 일하다보니 교사로 있을 때 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아 일주일에 두 번 씩 교외 스케치를 나갔다.

울산일요화가회에서 2회 전시회를 할 때는 회원으로 작품을 냈다. 노 화백이 울산일요화가회 3대 회장을 맡은 것은 90년대 초반이다. 회장이 된 후 가장 강력하게 추진했던 일이 회원 확보였다.

“어느 모임이든 회원들의 수가 많아야 회가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제가 회장이 되었을 때 이미 회원들 중 울산미술협회로 간 회원들이 많아 회원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낸 것이 일요화가회 전국대회를 울산에서 개최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울산은 지명도나 미술 시설로 볼 때 아직 전국대회를 열 형편이 못되었지만 회원 확보와 울산미술인들의 저변 확대를 위해 전국대회를 열기로 한 것이지요. 또 울산이 단순한 공업도시가 아니고 문화의 도시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울산에 전국대회가 개최된 것이 1993년이다. 서울은 물론이고 호남에서 350여명이 대회에 참석했다. 이처럼 숫자가 많다보니 울산에는 이들을 수용할 공간은 물론이고 숙박 시설이 없어 고생했다. 특히 울산에는 전야제를 열 공간이 없어 대회 장소를 양산으로 옮겼다.

당시 양산에는 통도사 가까이 해운농원이 있었는데 이곳은 회의장도 넓었고 숙박 시설도 좋았다. 더욱이 회원들이 스케치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는 통도사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장소 가 마땅하지 않아 대회는 양산에서 열렸지만 이 대회는 문화도시 울산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 대회의 성공으로 이때부터 열리는 일요화가회의 전국대회가 과거보다 훨씬 참가자가 많아지고 규모가 커졌다.

이후 노 화백은 서울은 물론이고 대구·청주·수원·여주·전주·광주에서 전국대회가 열릴 때면 항상 회원들과 함께 참석했다. 이때가 울산일요화가회의 전성기로 회원들이 50여명이 넘었다. 회원들의 요청으로 5대 회장도 맡았던 그는 이후 조직 운영보다는 그림그리기에 몰두했다.

노 화백은 사생화를 주로 그린다. 특히 그는 울산의 아름다운 자연을 화폭에 담기를 좋아한다. 그가 그린 그림들 중에는 ‘비조마을’과 ‘침수정’ ‘궁근정 마을에서’ 등 울산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그림들이 많다.

강정길 전 투다불류 갤러리 원장은 “노 화백의 그림은 소재가 다양하지만 그림 하나하나가 모두 그림의 본질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한다.

1990년 쌍룡정유가 주관하는 ‘제1회 눈빛미술제’에서 ‘태화루 우리품에 돌아오다’로 특상을 받은 그는 이 모임의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그동안 단체전 참여 외에도 개인전 5번, 초대전을 3번이나 가졌다. 그는 이런 행사가 열릴 때마다 김종필씨가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축전을 보내 격려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는 요즘도 울산일요화가회 회원들을 만날 때 마다 “울산일요화가회를 단지 미술 공부의 발판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회원으로 자긍심을 갖고 그림공부에 전념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림 공부는 기초가 중요합니다. 울산일요화가회에 들어오는 미술인들은 대부분 초보자이기 때문에 그림공부에 필요한 자세를 배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젠가는 떠난다는 생각을 갖기 보다는 항상 주인 의식을 갖고 공부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순을 내다보는 노 화백은 요즘도 월·수 일주일에 두 번씩 집에서 가까운 노인복지회관에 서 한자를 배우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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