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태왕이 박지 집사에게 말했다.

“지금 가야의 맹주인 대가야는 종발성에서 우리에게 패하는 바람에 지는 해가 되었소.”

“과연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가야도 백제에 패하는 바람에 마찬가지 운명이 되었습니다. 두 맹주국인 금관가야와 대가야가 이번 전쟁에서 패해 가야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같사옵니다.”

18개국 가야제국은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으로 짓밟히고 갈가리 찢겨져 김수로왕에서 시작된 250년 사직이 망하게 되는 국면이었다.

태왕이 땅바닥에 엎드린 박지 집사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하지만 대가야를 백제에서 구원하는 계책이 있소. 우리가 종발성에서 이사품왕과 목라근자를 포로로 잡았소. 너구리 같은 이사품왕은 내가 계속 포로로 잡아두겠소. 하지만 목라근자는 대가야 박지 집사에게 넘길 테니 목장군을 담보로 그 아들 목만치와 협상해 대가야를 찾도록 하시오.”

“황은이 망극하나이다, 폐하.”

박지 집사는 쾌재를 불렀다. 비록 이번에 세력을 잃었지만 성공만 하게 되면 대가야를 되찾고 그 수장이 될 수 있다. 고상지 아래에선 만년 이인자인 그였지만 고상지가 없는 대가야에서 일인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사품왕의 금관가야가 무너진 마당에 대가야는 확실하게 가야제국의 맹주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태왕은 박지를 지그시 노려보더니 말했다.

“헌데 지난번 황후 앞으로 올린 세작보고서는 박지 집사의 작품인가?”

박지는 가슴이 뜨끔했다. 꺽감이 후누장군의 아들이 아니라 회령왕의 아들이라는 보고서를 세작을 통해 장화황후에게 올렸던 것이다. 장화황후의 질투에 불을 질러 고상지와 여옥, 꺽감과 수경을 동시에 제거한 뒤 박지가 대가야의 전권을 쥐려고 한 사건이었다.

박지는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저는 아닙니다. 고상지 도독이 세작을 통해 올린 보고서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멍청한 고도독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올린단 말인가. 그건 스스로 등에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꼴이 아닌가.”

보고서의 골자는 고상지 도독이 여옥왕비와 야합하여 회령왕의 아이를 죽이지 않고 바꿔치기했으며 그 아이가 꺽감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질투에 눈이 먼 장화황후의 불같은 공격과 여옥의 침착한 방어, 태왕이 여옥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로 박지의 반간계가 실패로 끝나고 만 사건이었다.

교활하고 노회한 박지 집사는 태왕의 뜻을 재빨리 간파하고 빠져나갈 방도를 찾았다.

“고장군이 왜 그런 보고서를 올렸는지 아둔한 저로서는 잘 모르겠나이다. 폐하, 하지만 대가야도 신라와 백제처럼 왕손인 꺽감을 중심으로 나가야 한다는 그런 뜻이지 않았을까요?”

 

우리말 어원연구

죽이다. 【S】jighida(지그히다). 【E】kill. 어원을 살펴보면 ‘ji’는 생명, ‘ghida’는 ‘긋다’로 ‘생명을 끊는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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