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기록유산이 된 ‘조선통신사 기록물’의 범위가 임란이후 조선중·후기에 한정돼 논란이 되고 있다. 울산출신 이예 등이 활역한 조선 초기 5회의 사절단이 누락된 것이다. 사진은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왜관도’(1783). 연합뉴스

울산출신 충숙공 ‘이예’ 선생
길 닦은 기록물 333점 등재
조선 초기 5회의 사행 누락돼
범위 바로잡는 방법 강구해야

조선 초기 울산출신 충숙공 이예(1373~1445)가 길을 닦은 ‘조선통신사’ 기록물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민간단체가 추진한 조선통신사 세계기록유산 범위는 조선 초기의 통신사 기록이 제외돼 있어 향후 이를 바로잡는 학계와 지역사회의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31일 유네스코가 공개한 신규 세계기록유산목록을 통해 조선통신사 기록물 111건(333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고 밝혔다.

등재된 조선통신사의 범위는 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바쿠후(幕府)의 요청으로 조선이 일본에 12차례 파견한 외교사절로만 규정됐다.

울산의 충숙공 이예 등이 통신사로 다녀왔던 조선 초기 5회의 사행은 누락된 것이다.

이에 대해 조선통신사학회와 이예선생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유네스코 등재는 세계 최초로 통신사의 개념을 한일양국 프레임에서 세계의 프레임으로 확장하는 의미”라며 “조선 후기로 한정된 유네스코 조선통신사 개념은 향후 통신사 연구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문화재청은 세계기록유산 범위가 축소된데 대해 “해당 등재사업은 민간차원에서 이뤄진 사업이라 문화재청은 행정적 절차를 지원하는데 그쳤고 신청서 내용을 작성하는데도 깊이 관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10년간 일본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와 함께 조선통신사 한일공동등재사업을 추진했던 부산문화재단은 “조선통신사의 세계기록유산 범위는 양국간 학술위원들이 수차례 벌인 토론과 합의를 통해 결정된 사안이었다. 임란 이후 12회의 사행으로 국한된 이유는 양국이 전쟁으로인해 갈등을 겪었으나 통신사 왕래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 평화를 지속한데 포인트를 둔 것이며, 기록물에 대한 양국간의 가치를 신청서에 분명히 명시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조선 후기에 치우친 통신사 개념은 오랫동안 학계에서도 논란의 대상이었으나 등재를 위한 전략적 측면을 고려해 바로잡지 못한 부분이 있다. 늦었지만 조선통신의 유산의 범위를 조선 전기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날 문화재청 발표에 따르면 국난극복 열망을 국내외에 알린 ‘국채보상운동 기록물’(2472건), 왕가의 정통성과 권위 담은 ‘조선왕실어보 및 어책’(669점)도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8개국 14개 단체가 신청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2744건)은 등재가 보류됐다. 홍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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