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남거성에서 박지를 만나 목라근자를 넘겨준 광개토태왕은 5만의 보기군을 이끌고 북으로 질풍노도처럼 달렸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보기군은 남거성에서 평양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태왕은 남정의 기간 동안 모용성의 침입을 미리 경계했지만 정작 뒤통수를 맞으니 눈앞이 번쩍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모용성, 이 승냥이 같은 놈을 반드시 응징하리라.’

왕은 평양을 지나치고 단숨에 국내성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척동과 연개남이 태왕에게 간했다.

“폐하, 날도 저물고 군사와 말도 지쳤습니다. 무구와 말안장도 정비해야 하니 평양에서 일박을 하고 진군하는 게 좋겠습니다.”

태왕은 전령과 세작을 통해 후연의 소식을 매일 들었다. 다행히 재상 을력소가 모용성에게 미인계를 넣어 그의 발을 요동의 남소성에 묶어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내성 외곽 방어선은 철옹성과 같이 튼튼하니 더 이상 서진은 하지 못할 것이다.

태왕은 부하 장수들에게 말했다.

“좋다. 오늘밤은 평양에서 머물고 내일 새벽 일찍 출진한다.”

평양의 서궁에서는 장화황후와 여옥을 비롯한 비빈들이 맞아주었다. 남정의 기간 동안 보지 못한 이들과 해후하고 안부를 들으니 반가웠다. 밤늦게 태왕은 황후전이 아니라 소후의 침전에 들었다.

여옥이 태왕을 반기며 물었다.

“먼 남정에 옥체는 괜찮으신지요?”

“좀 피곤하구려. 술은 없소?”

여옥이 도자기 술병을 내면서 말했다.

“다행히 저에게 중국에서 건너온 주귀 한 병이 있습니다.”

“주귀라면 중국술 중에서도 황태자로 불리는 좋은 술 아닌가.”

여옥은 도자기 병을 따서 붉은 술을 가야의 고배 술잔에 따르며 말했다.

“지금 모용성의 침입으로 국내성이 위태롭다고 들었습니다.”

“당신도 고구려 여인이 다 되었군. 분명 대가야가 백제에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고구려를 먼저 염려하는 것을 보니.”

“저는 이제 고구려 여인이고 폐하의 부인이에요. 가야보다 고구려가 우선입니다.”

“하지만 가야의 회령왕은 잊지 못할 것 아니오?”

“그를 잊은 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여옥이 회령왕을 잊을 만 하면 태왕이 한 번씩 회상시켜 주는 게 부담스러웠다.

“소후, 만약 꺽감과 함께 가야로 돌아가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저는 백제와 싸워 반드시 가야 땅을 되찾을 것입니다.”

결연한 여옥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태왕은 술잔을 비웠다.

전쟁터는 한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자는 평화와 안식을 무너뜨린다. 태왕은 오랜만에 밤꽃보다 더 진한 욕정의 냄새를 풍기며 여옥에게 다가갔다.

 

우리말 어원연구

안장: 안장의 우리말은 ‘길마’이다. 길마: 【S】girma(기르마), 【S】sad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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