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절곶에서 - 박현율作 바다는 언제나 다른 모습이다. 해와 달을 따라 다른 빛깔을 낸다. 바위를 만나 하얗게 부서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자리 그대로다. 다른 듯 같은 모습으로 어떤 것도 품는다. 위로가 된다.

절제·조화로 새로운 음악 개척한 드뷔시
교향곡 ‘바다’에서 옛 고향·친구 떠올라
음악이 무의식에 남은 과거를 재생시키듯
시는 인간의 마음 속 순순함을 끌어올려
음악과 시를 사랑하는 사람중엔 악인없어

‘새벽안개 걷히자 아침 바다가 눈을 뜬다. 파도가 해안으로 몰려오자, 전날 밤에 출항한 배들이 포구로 돌아온다. 갈매기는 흰 등을 빛내며 흐른다. 바람이 불어가는 쪽 어디선가 꽃이 피리라.’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는 이 같은 인상을 주는 곡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는지 몰라도 내가 상상하는 모습은 그렇다. 나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어릴 적 친구와 고향 마을을 떠올린다.

소를 몰고 오면서 바라보던 바다와 하늘과 구름. 섬과 섬 사이로 지나가는 배들. 바닷가 푸른 보리밭과 노란 장다리꽃. 이제는 사라졌지만 먼지를 날리던 비포장도로에서 여름날이면 뜨거운 햇살 아래에 잎을 팔랑이던 버드나무와 그 곁을 흘러가던 도랑물과 매미 울음소리. 개펄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라던 미역과 김, 파래와 해삼, 바다 게와 고둥과 속과 어린 물고기들. 그리고 봄부터 몰려와 바다를 타고 몰려다니던 멸치 떼와 멸치를 잡으면서 부르던 뱃사람들의 노래. 저녁노을이 바다를 물들일 때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와 밤이면 바다에서 깜빡이던 등대 불빛과 달빛을 타고 반짝이던 윤슬….

그랬다. 내 어릴 적 바닷가 마을의 풍경들이다. 갯냄새와 고기비늘이 튀던, 이 풍경 속에는 하모니카를 불던 소년이 있었다. 소아마비였지만 우리들과 함께 어울려 살던 소년은 그해 가을날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가려다 바다에 빠졌다. 소년이 가고자 했던 곳이 통영이나 부산 아니면 바다 너머 아득한 미지의 세계였는지 모르지만, 소년은 평소에 불던 하모니카를 손에 꽉 쥐고서 해변에 누워 있었다. 소년은 가마니때기에 덮인 채로 비석도 무덤도 없이 땅 속에 묻혔다.

내가 한국 가곡 중 ‘떠나가는 배’와 ‘비목’을 즐겨듣는 이유는 소년의 하모니카 소리와 그의 죽음 때문이다. 가곡 ‘비목’과는 다르지만 나무로 비석 하나 새겨주고 싶었던 소년, 그가 즐겨 연주하던 곡인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로 시작되는 ‘고향 생각’과 ‘바우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의 ‘바우고개‘와 ‘오가면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로 시작되는 ‘그 집 앞‘ 등의 가곡과,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의 ‘오빠 생각’ 등의 동요가 기억난다. 특히 가을 저녁 무렵 연주하던 ‘고향 생각’ 때문에 나는 남몰래 눈물, 콧물을 훔쳐야 했다.

그는 나이는 나보다 많았지만 국민학교(초등학교)는 늦게 들어갔다. 학교도 집안 사정 때문에 다니다가 그만 두고 집에서 홀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와 같이 지내는 친구는 개 한 마리와 하모니카였다. 다른 애들이 그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놀려댈 적마다 그는 혼자서 하모니카를 불곤 했다. 하여튼 음악책도 제대로 구할 수 없고, 음악을 배울 수 있는 선생마저 없던 시절에 하모니카 소년의 연주 소리는 참으로 신기하고 신비로웠다.

지금도 나는 진정 음악과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악인이 없다는 말에 동감하고 있다. 천성이 순수하고 맑지 않으면 음악과 시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모니카 소년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자기 영혼을 하모니카에 담아 연주했던 소년은 내게 이별과 죽음 그리고 음악에 대해서 눈뜨게 해 주었다. 물론 이런 사실을 깨달은 것도 내가 어느 정도 철이 들고 난 뒤의 일이지만, 아직도 나는 하모니카 소년의 영혼은 순수한 한 편의 노래이자 시라고 생각한다.

다시 클로드 드뷔시 음악으로 돌아가자. 그의 음악은 베토벤처럼 다이내믹하지도 바그너처럼 자기도취적이지도 않으며, 낭만파 음악에서 보이는 감정과잉도 적다. 그는 가장 프랑스적이면서 당시 인상파 화가인 모네, 마네 등과 상징파 시인들인 베를레느와 보들레르, 말라르메 등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음악의 영역인 인상주의를 개척했다. 내가 드뷔시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절제와 조화에 의해 새로운 음악 영역을 개척했다는데 있다.

아니, 이 이유는 옳지 않다. 그 보다도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의 소리를 통해 잊고 있었던 하모니카 소년을 떠올린 데 있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무의식 하나를 현실에 재생시킨 소리요, 살아있는 이미지의 부활이었다. 결국 음악도 이런 게 아니겠는가. 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순수하고 맑은 것을 끄집어내어 현실의 삶을 순화시키고 감동케 하는 것이 아닌가.

쓸쓸하거나 살기에 지쳐 고달픈 날이면, 나는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를 들으면서 바다가 우는 소리와 가마우지가 날아간 수평선과 그 너머로 떠나간 배와, 그리고 하모니카 소년을 떠올린다.
 

▲ 박현율씨

■ 박현율씨는
·개인전 6회(울산문화예술회관)
·해외전, 초대 및 단체전 270회
·대한민국한국화구상회 부회장
·울산미술대전 초대작가
·울산미술협회 부지회장 역임
·현, 울산한국화회 회장
·현, 울산미술협회 감사

 

▲ 문영씨

■ 문영씨는
·1988년 <심상>(시) 등단
·2012년 <한국동서문학>(평론) 등단
·시집 <소금의 날> 외.
·(현)문학울산 주간
·오영수문학관 문예창작(시)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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