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17)울산언론과 이강걸 특파원

▲ 경향신문 1984년 1월13일자 3면. 한반도 다자회담 관련 손재식 장관과 이강걸 위원의 대담이 “동풍 이건 서풍 이건 주역은 남북한” 이란 제목으로 다뤄졌다.

울주군 온산면에서 태어나
국제신문-조선일보 등 거쳐
언론인·작가로 왕성한 활동
국회의원 질의서 써주기도

경남일보 창간한 추전 김홍조
일제시대 기자 박병호·김기오
동아일보 월남특파원 김치석 등
옛부터 울산 출신 언론인 많아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울산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에서 언론인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한 것은 일제강점기 3·1운동 후다. 이 때 일제가 소위 문화정책 일환으로 조선과 동아일보 창간을 허가하면서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에서도 주재기자들이 활동하게 된다.

그런데 이보다 10여 년 전 울산에서 언론 창간에 나선 인물이 있다. 1868년 중구 반구동에서 출생했던 추전(秋田) 김홍조는 1909년 진주에서 경남일보를 창간한 후 초대 사장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의 명 사설을 실어 투옥되었던 장지연씨를 경남일보 주필로 초빙한 것도 추전이었다. 추전은 1920년 동아일보 설립 때는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일제강점기 울산 언론인들은 단순히 기자로만 활동하지 않았다. 동아일보 박병호, 조선일보 김기오, 시대일보 강철은 언론을 통해 주민계몽에 나서고 스스로 청년운동을 벌이면서 항일운동가로 활동했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3·1 운동 후 신간회, 울산청년회, 민우회 등 청년단체들을 만드는데 앞장섰고 이들 단체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면서 일제 탄압에 항거했다.

우정동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했던 오덕상은 특이하게도 일제 말 시모노세키(下關)로 가 그 곳에 신문사를 차려놓고 이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을 대변했던 인물이다.

이런 전통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울산출신으로 중앙에서 활동한 언론인들이 많다.

김지태와 함께 부산MBC 창립을 주도했던 안성수는 병영출신으로 나중에 여수 문화방송을 창립해 초대 사장을 지냈다. 검사 출신으로 이명박 대통령 시절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위원장을 지냈던 안강민이 그의 아들이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던 이채주 그리고 일간스포츠 부국장을 지냈던 박원구, 경향신문 논설위원을 지냈던 최주효도 울산 출신이다.

동아일보에서 명 기자로 명성을 날렸던 김치석도 울산 언론사를 얘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부모가 중앙시장 입구에서 그릇 장사를 해 부산고등학교에 유학까지 갔던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부산고 2학년 때 고대 법대에 합격했던 그는 대학 졸업 때까지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동아일보에 있는 동안 월남특파원을 지냈던 그는 김현옥과 친해 김씨가 내무부 장관이 된 후 내무부 대변인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말년에는 울산으로 와 경상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던 그는 국가대표 배구 선수 강만수의 장인이기도 하다.

방송인으로 중앙에서 이름을 떨쳤던 인물들도 많다. 울산MBC 출신의 정연국은 서울MBC에서 런던특파원을 지낸 후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이 되기도 했다. 울산 출신으로는 60년대 초 이후락이 지금의 대변인인 격인 청와대 공보실장을 지낸 후 50여 년 만의 일이다.

70~80년대 격변의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울산 출신 언론인도 있다. 1936년 울주군 온산면에서 태어났던 이강걸이 경남상고와 연세대학교를 거쳐 국제신문 견습 4기로 들어간 것이 1961년이다. 이때만 해도 신문사는 경쟁률이 높아 4명을 뽑는 시험에 179명이 응시했다. 이 중 1차에서 8명이 합격했으나 다시 2차 시험을 거쳐 이기원, 이강걸, 신원호, 전상수 등 4명만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이들 4명 중 여자 견습생 전상수를 제외하고는 3명이 모두 울산 출신이었다. 봉계 출신의 이기원은 국제신문 재직 중 중병을 얻은 후 고향으로 와 시인으로 활동했고, 이강걸은 온산 출신으로 주미특파원을 지냈다. 삼동 출신의 신원호도 KBS 울산국장을 지낸 후 경상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연세대 정외과 출신으로 국제 감각이 뛰어났던 이강걸은 국제신문 입사 후 조사부에서 외신을 담당했다. 당시 이씨와 함께 견습생으로 교육을 받았던 신원호는 “60년대만 해도 기자들 중에는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데 이씨는 견습 때부터 영어를 잘해 주위 기자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회상한다.

이후 국제신문 서울 주재기자로 간 그는 당시 조선일보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던 국제신문 출신의 조영서 시인의 추천으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잠시 외신부에서 일하다가 경향신문으로 갔다. 경향신문사에서 외신부 차장과 부장을 지냈던 그가 주미 특파원으로 나간 것이 70년대 중반이다. 언론인으로 필명을 날렸던 때가 이 무렵이다. 그가 주미특파원으로 활동할 때는 ‘박동선 사건’이 터져 한미 양국이 외교적으로 복잡했을 때였지만 그는 이와 관련된 뉴스를 매일 잘 분석해 보도했다.

신문 보도만 한 것이 아니다. 그가 경향신문 특파원으로 활동할 때는 경향신문과 MBC가 통합하는 바람에 마이크도 잡아야 했다.

성격이 호탕해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던 그는 특히 문인들과 친해 1978년 미당 서정주가 ‘세계방랑기’를 쓰기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안내를 맡기도 했다.

특파원으로 그가 미국 생활에서 얼마나 성실했나 하는 것은 4년의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국내로 돌아와 발간한 책에서 알 수 있다.

귀국 후 논설위원으로 있었던 그는 1981년 <미국의 두 얼굴>을 발간했다. 이 책은 그가 미국특파원으로 보고 느끼고 체험한 사실들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당시 국내 언론은 이 책이 미국을 다각적 측면에서 보고 객관적으로 분석했다고 극찬했다.

얼마 후 다시 <정치가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정치인 레이건과 인간 레이건을 분석해 썼다. 특히 그는 이 책에서 미국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예견하지 못했던 레이건의 신보수철학의 개막을 예고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이처럼 학구적인 기자였지만 불의를 참지 못했다. 그가 경향신문에서 한직으로 밀린 것은 이진희 사장이 오면서다. 이씨가 경향신문 사장으로 올 때 대부분의 경향신문사 직원들은 이 사장을 전두환 정권의 낙하산 인사라면서 좋아하지 않았다. 직원들 중에서도 특히 이씨는 이 사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이 사장이 편집국에 나타날 때도 인사조차 하지 않았고 심지어 책상 위에 다리를 걸친 채 일해 미움을 받았다.

이후 정경연구소장 자리로 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가 만난 사람이 같은 학성 이씨로 불교신도회 사무국장로 있었던 이동휘였다.

이후락은 70년대 중반 정계에서 물러난 후 불교신도회 회장이 되면서 만리동에 서원사 사찰을 세웠는데 이 때 조카인 이씨가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이씨는 불자들을 데리고 불교성지를 자주 여행했는데 불심이 깊었던 이강걸씨의 부인 안점복 여사가 항상 동행했다. 서원사에서 예불이 열릴 때면 안 여사 외에도 신상우 국회의원의 부인 조정강 여사 그리고 나중에 부도 수표로 우리 경제를 흔들었던 장영자 여사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이강걸은 당시 김태호 국회의원이 국정 질의를 할 때면 질의서를 써주기도 했는데 이 때 원고를 받기 위해 이씨 집을 찾았던 사람이 이동휘씨다. 이런 인연으로 당시 이강걸 집을 자주 방문했던 이씨는 무엇보다 이강걸 집에 자료가 많은 것에 놀랐다고 말한다.

이씨는 “김태호 의원이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국정질의를 할 때입니다. 이때 질의서를 이강걸씨에게 부탁했는데 질의 날짜는 가까워 오는데도 이씨가 질의서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아 제가 속이 탔습니다. 그런데 질의 날짜를 하루 앞둔 어느 날 저녁 이씨가 나를 당시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뒤 파레스호텔로 부르더니 ‘지금부터 내가 말 하는 것을 따라 적어라’고 해 그대로 썼더니 아주 좋은 질의서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그 글을 김 의원에게 주었더니 김 의원이 한번 읽어보더니 대단히 잘썼다고 칭찬했습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처럼 논객으로도 필명을 날렸던 그는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있던 1989년 2월 향년 53세로 일찍 타계했다. 아쉽게도 그가 일찍 타계하고 더욱이 학업을 위해 온산을 어린 시절 떠났기 때문인지 고향 온산읍 삼평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요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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