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여옥과 꺽감, 수경은 패강에서 가야배를 타고 서해안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사람과 물화를 실은 가야배는 서해안과 남해안 연안을 따라 서서히 내려갔다. 강화 당진 보라 사물 고사포 골포를 지나 금관가야에 도착했다.

화려했던 금관가야는 고구려군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종발성의 함락으로 외국과의 통상은 중단되었고, 왕은 포로로 잡혀가고 역병이 돌아 백성들의 시체가 처처히 쌓여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금관가야를 떠나 산으로 들로 먹을 것을 찾아 유랑하고 있었다. 가야배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아라와 비화를 지나 밤중에 회천으로 들어갔다. 미리 연락이 된 박지 집사와 후누 장군이 여옥과 꺽감, 수경을 마중하러 나왔다.

후누가 여옥왕비와 꺽감을 보자마자 바닥에 엎드리며 큰절을 하였다.

“마마, 저희들이 부족해 선조들이 피로 지켜온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강한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기가 어찌 쉽겠어요. 그래도 후누 장군은 이번 전쟁에서 적화에서 아신왕의 백제군을 물리친 유일한 장군이라 들었소.”

“과찬의 말씀입니다. 이제 왕비마마와 회령대왕의 아들 꺽감왕자가 돌아왔으니 남은 병력으로 백제군을 쳐 대가야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오랜만에 해후해 반가웠지만 곧 대가야가 놓인 엄혹한 현실 앞에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후누장군은 이들을 가야산에 설치한 후누장군의 군영으로 안내해 가야산 군막에 머물면서 목만치를 물리칠 일을 논의했다.

박지 집사는 가능한 빨리 목만치와 협상해 대가야를 찾자는 협상파였고, 후누 장군은 무력으로 어라성을 치고 들어가자는 주전파였다.

여옥은 태왕의 뜻을 받들어 전쟁보다는 협상을 택했다. 포로로 잡고 있는 목라근자는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목라근자는 목만치의 아버지라는 신분을 떠나서 아리수 이남에서 백제 신라 왕 다음으로 무력이 강하고 재산이 많은 자로 목만치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자였기 때문이다.

박지는 목만치에게 목라근자를 포로로 잡고 있으니 무장해제한 몸으로 가야산 군영으로 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전갈을 받자마자 목만치는 호위무사 없이 단기필마로 가야산으로 찾아왔다.

목만치는 군영을 둘러보며 박지에게 물었다.

“나의 아버지 목라근자 장군은 어디 있소?”

“아들아, 네 아버지다.”

막사에서 얼굴이 초췌한 목라근자가 나오자 목만치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말 어원연구

패강(대동강)
보라(나주) 사물(사천) 고사포(고성)
골포(거제)
아라(함안) 비화(창녕)
근초고왕 때부터 활약한 백제의 장군이자 용병대장. 일본서기에 의하면 목라근자는 그의 아들 목만치와 함께 7가야를 정복하고 다스렸다고 하나 한국 측의 사료적 근거는 전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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