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아신왕이 거듭 목만치에게 아버지 목라근자 송환은 불가하다고 말했다.

“목장군, 포로송환 협상은 아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 아버지는 근초고대왕 이래 5대에 걸쳐 백제의 왕업을 이룬 충신입니다. 제발 한번만 더 통촉하여.”

아신왕은 목만치의 말을 끊으며 위례성 대정전이 울릴 정도로 호통쳤다.

“왕명을 거역해 반역할 텐가! 그만 돌아가서 대가야나 잘 지키도록 하여라.”

“…… 알겠나이다.”

목만치는 아신왕에 발에 걷어차인 듯한 굴욕감을 느끼며 위례성 대정전에서 물러났다.

목라근자는 백제의 대성팔족 중의 으뜸인 목씨 출신으로 옛 마한 땅의 목지국 진왕의 후손이었다. 근초고왕 때부터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 아신왕 5대왕을 섬긴 장군이자 재상이었다. 한 때 가야 십이국 중 칠국을 평정했고, 남만의 침미다례까지 도륙한 대장군이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강한 무력을 갖춘 장군이었지만 그것보다는 외국과의 교역과 무역의 이익을 중시하는 상인이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틈바구니에 있는 가야를 백제의 영향권에 두면서 왜와의 교역창구로 삼았다. 신라와의 교역 규모도 꽤 컸고, 그는 신라를 중시하여 신라여인과 결혼해 아들 목만치를 두었다. 목씨 부자는 애당초 이 전쟁에 반대하고 신라와의 평화를 원했다. 목라근자는 아내의 나라인 신라를 사랑했고, 목만치도 어머니국인 신라를 그리워하고 외가인 금성을 여러 번 방문했다.

그러나 야심 많은 백제 아신왕은 금관가야의 이사품왕을 부추치고 목라근자에게 공격 명령을 내려 신라를 친 뒤 배후에서 가야의 땅을 집어삼킨 것이다. 이 전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은 이사품왕이었고 그 다음으로 목라근자였다. 목라근자는 왜와 가야와 신라에 대한 교역 독점권을 몽땅 잃어버린 임나왜소의 주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신왕은 목라근자를 이번 전투의 사석으로 사용하고 미련 없이 버렸던 것이다.

‘대가야나 잘 지키라고? 호랑이도 잡히면 개 취급을 당하는 것이 전쟁터의 법칙이라고?’

그는 눈물이 번진 눈으로 아리수를 젖줄로 번창한 위례성을 보았다.

‘아, 아버지가 어떻게 이룩한 백제인데 이제 와서 아버지를 개 취급하다니!’

아신왕의 차가운 냉대에 목만치는 분루를 삼키며 대가야로 돌아왔다.

목만치는 위례성에서 막 돌아와 대가야를 보위하고 국정을 바로 잡으려고 해도 아신왕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반역죄를 덮어쓰더라도 더 이상 왕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 스스로 협상의 출구를 찾을 것이다’고 결심하던 차에 박지로부터 목라근자의 송환 협상 전갈을 받았다. 그는 만사휴의하고 단기필마로 가야산 적장의 군막으로 달려온 것이다.

 

우리말 어원연구

근초고왕 때 목라근자가 평정한 일곱 가야의 지역은 비자벌(창녕) 남가라(김해) 탁국(경산) 안라(함안) 다라(합천) 탁순(대구) 가라(고령)로 추정된다.

남만의 침미다례는 류큐, 왜의 후쿠오카 등으로 추정되었으나 최근에는 전남의 해남, 광주 등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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