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록에서 보듯 우리나라는
결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
지진대처 매뉴얼 철저한 실천을

▲ 홍영진 문화부장

우리나라에서 지진을 관측한 것은 1905년 기상청이 인천관측소에 지진계를 설치한 뒤 부터다. 물론 그 전에도 지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최초의 기록은 고구려 유리왕 21년(서기 2년)의 일이다. ‘가을 8월에 지진이 났다’는 내용이다.

지진에 의한 인명 피해 정도를 구체적으로 밝힌 기록은 신라 대에 일이다. 신라 혜공왕 15년(779년)의 일이니 ‘봄 3월에 경도(경주)에 지진이 났는데, 백성들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고 돼 있다. 그 날의 지진을 오늘날의 단위로 따져보면 약 6.7 규모에 해당된다고 한다. 지난 2010년 7.0 규모의 아이티 지진 피해가 상당했는데, 779년 신라의 지진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는지 가늠할 수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시대 지진발생 횟수는 150회 이상이었다. 고려 제26대 왕인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과 원세조 쿠빌라이 칸의 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사 최초의 ‘혼혈왕’이다. 그가 재임했던 1311년에는 지진 때문에 왕궁까지 피해를 입었다.

조선의 지진 기록은 횟수가 더욱 늘어나고 그 날의 피해 정도까지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지진 기록은 1500건이 넘는다.

태종대에는 그가 즉위한 해(1400년)부터 무려 18년 간 해마다(태종 17년 제외) 1~3차례씩 지진 기록이 이어진다. 그 중 태종 16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지진은 3일 동안 이어졌다. 중종 13년(1518년)에는 ‘도성 안 사람들이 밤새 노숙하며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전한다. 숙종 7년(1681년) 5월에는 지진으로 바닷물이 육지를 뒤덮은 일도 벌어졌다. ‘소리가 우레 같았고 담벼락이 무너졌으며 기와가 날아가 떨어졌다’는 그 날의 상황은 ‘양양에는 바닷물이 요동쳤는데, 마치 소리가 물이 끓는 것 같았고…’로 이어진다. 그에 앞서 인조 21년(1643년) 7월에도 지진이 있었는데 ‘울산 근처에서 큰 지진이 발생해 경상도, 전라도는 물론 한양에까지 전국적으로 지진이 이어졌다’고 한다.

어제(15일) 포항에서 5.4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신문사 사무실내 여직원들이 혼비백산하며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몇몇 사람은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도 했다.

지난 번 경주 지진과 달랐던 점은 지진 알림 문자가 진동이 끝나기 전에 도착할만큼 신속했다는 것. 다만 모든 이에게 전달되지는 못했다. 첫 지진과 여진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여전히 문자를 받지못한 사람들이 많아 향후에는 수신 누락 빈도를 줄이는 대처가 필요하겠다.

한가지 더 아쉬은 점은 딸 아이로부터 도착한 문자 내용이었다. 학교 강의 중인데 지진 때문에 학생들이 동요해도 ‘교수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와 학과에서 연거푸 긴급전달된 ‘건물 밖 대피’ 문자를 받고서야 부랴부랴 건물 밖으로 나왔다. 같은 시각 울산의 몇몇 행사장에서도 대피를 하지 않거나 뒤늦은 대피로 참가자들의 원성을 샀다고 한다.

행안부의 국민행동요령에는 지진발생(4.0 기준) 이후 ‘계단을 이용해 밖으로 나와 운동장이나 공원 등 넓은 곳에 대피하라’고 돼 있다. 재난대비 안전을 위한 국민행동요령은 그 어떠한 공간에서 중요한 행사가 진행 될 지라도 항상 같아야 한다. 지진으로부터 더이상 안전하지않은 나라의 국민이 됐다. 안일한 대처가 큰 사고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미 경험했다. 기본적인 매뉴얼도 몰라 우왕좌왕하는 일은 더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홍영진 문화부장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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